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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역류하여 강이 되다
궈징밍 지음, 김남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2년 4월
평점 :

웃음 짓는 치밍을 바라보는 이야오의 마음속에는 한줄기 강이 흐르고 있었다. 과거 한때 느꼈던 기분과 흔들림이 모두 강 아래 고운 모래 속으로 묻혀 버렸다. 언제 다시 지각의 움직임 속에서 수면 위로 드러날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미 화석이 되어 버렸을지, 아니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부스러져 버렸을지 역시 모를 일이었다. 짧은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이런 일들은 눈물처럼 반짝인 뒤 천천히 강 아래로 침잠하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떠난 치밍이 다시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더 매혹적인 빛을 뿜어냈다. 이제 다시는 자신과 함께 차갑고도 기다란, 그리고 어두운 골목을 지나갈 필요가 없는 그였다. _360~361p.
같은 골목에서 자라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야오와 치밍, 하지만 둘의 가정 형편은 극과 극일정도로 다르다. 아빠가 가족을 떠나고 매일같이 엄마의 거친욕과 구타, 구박을 받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오, 반면 아버지의 성공으로 곧 이 골목을 떠나 고급 아파트에 입주할 예정인 치밍은 전교 일 등의 우등생, 교사와 부모님들의 기대와 또래 여학생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매일 함께 등교하던 어느 날, 이야오의 부탁으로 임신테스터기를 사다 준 치밍은 이야오에게 닥친 '임신'으로 인해 더욱더 막다른 곳으로 몰리는 이야오를 돕고 싶지만... 이야오의 상황을 알게 된 탕샤오미, 이야오와 치밍은 쌍둥이 남매와 묘하게 얽히게 되는데... 이들의 상황은 어떻게 흘러가려는가?
누구보다 가까웠던 이야오와 치밍은 이야오의 임신으로 인해 서로의 상황과 감정을 더욱 인식하게 되고, 감정선을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고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어 사랑과 우정 사이 그 즈음에서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자꾸 맴도는 부분이기도 했다. 10대의 임신, 학교폭력, 가정폭력, 언어폭력 등 이 모든 상황이 '이야오'에게 집중되어 극한의 상황에 도움이 필요한 순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고, 반복되는 상황 속에 잠시 평범한 일상을 맛보는듯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조금씩 고랑이 파이며 고이기 시작한 슬픔은 흐르지 못하고 찰랑이며 차올라 극한의 슬픔에 이르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너무도 안아주고 싶었던 이야오, 한동안 이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 추천하고 또 추천합니다! (개인적으론 문장이 정말 좋았어요!)
무엇이 되었건 이 핏자국과 같을 것이다. 무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선명한 붉은빛이 검게 변색되고 결국은 그저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젊은 몸과 죽음의 부패. 단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다.
긴 시간을 두고 흘러간다. _105p.
치밍도 석양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따뜻하고 슬프면서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나의 세계에서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따뜻한 빛과 좋았던 시간을 한데 쓸어 담은 채 나의 세계를 떠나가는 것이었다.
서글픈 온기이자 따뜻한 슬픔이기도 할 테지.
(···)
차가운 어둠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서글픈 온기.
그들은 한때 나란히 있었다.
그들은 함께 성장했다.
그들은 아직 함께 있다.
그들은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을까? _226p.
삶 속에는 이렇게 슬픈 은유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한때 너와 나는 매일 아침 함께 저 빛이 들어오는 출구를 향해 걸었다. 이제는 그가 나를 태우고 나에게 버려진, 어둠 속의 너를 떠나고 있다. 자전거 바퀴가 한 바퀴 두 바퀴 굴러가며 천천히 너에게서 멀어져 갈 때, 나는 내가 아는 세계에서 조금씩 조금씩 버려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세계가 나를 버릴 때 나 역시 천천히 손을 놓았다.
이제 다시는 그런 아침은 없을 것이다. _3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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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