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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자를 쓴 여자 ㅣ 새소설 9
권정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평점 :

#도서협찬 #검은모자를쓴여자
지금도 민은 그날 보았던 검은 모자를 똑똑히 기억한다. 낯선 존재를 감싸고 있던 외피의 특징 중에서 유달리 검은색 모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모자의 검은 후광이 한 존재의 전체를 압도해버릴 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_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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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까지 공연을 한 40여 분 동안 여러분은 결코 고양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양이가 허상일까요? 아닙니다. 고양이는 모자 속 어딘가에 숨어 있었겠지요. 안과 밖, 두 가지로 구분하지 마십시오. 실재하는 것이 허상이고 허상 또한 실재합니다. 무대 밖으로 내려가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겠지요. 모자 안팎에 진실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순간 비로소 형체를 갖고 여러분을 따라다닙니다. 따라서 삶이란 모자 속 고양이를 꺼내는 일의 연속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꺼내는 순간 결정되는 거예요. _212~213p.
이야기는 민이 아파트 헌 옷 수거함에서 낯선 여자가 검은 모자를 쓰고 자신의 집을 감시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을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검은 모자를 쓴 여자는 정말 자신의 집을 보고 있었던 걸까? 작지만 소중한 일상, 아이와 늘 다니던 약수터 산책길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기묘한 사고로 아이를 잃은 여자 민. 첫아이 은수를 잃고 상처가 컸던 민이 일상을 조금씩 회복해갈 즈음 눈 내리는 겨울밤 그들 앞에 나타난 아이와 검은 고양이는 부부의 삶의 빈 공간을 메워 주는듯했지만... 과연 이 선택이 옳았던 걸까?
민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실재와 허구,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미스터리 심리 상황극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앞의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지키지 못했던 민의 죄책감, 그리고 의심들은 점점 커지는 고통을 마주하며, 그녀의 삶을 통해 고통과 불행은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에 빠져들며 더한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된 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책장을 덮고도 며칠을 다시 펼쳐보고 또 보았던 <검은 모자를 쓴 여자>, '검은 모자를 쓴 여인'과 어느 날 그들 앞에 나타난 동수와 검은 고양이의 존재가 민의 삶에 드리운 그림자가 민의 상상인지, 실재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할 것이다.
거실로 나온 민은 잠든 고양이를 어둠 속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직감적으로 민은 고양이가 자지 않고 자신을 살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이 없는 길고양이가 아닌가. 혹시 목사 부부가 기르던 고양이가 아닐까? 동수도 혹시 그들의 자식이 아닐까.... 불안해서 자라난 온갖 억측이 민의 마음을 괴롭혔다. _68~69p.
거실에 서 있는 껍데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의 존재는 썩어가는 육신의 마지막 번민일까. 민은 거실로 나와 창문을 열었다. 썩는 냄새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아이 방으로 가보았다. 그곳에도 시체가 놓여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부패가 꽤 진행된 듯 이미 알아볼 수 없었다. 형체 없는 얼굴에 죽은 은수의 얼굴이 겹쳤다. 죽은 자의 얼굴 위에 수의가 놓이고 관이 놓이고 상여 소리가 지나갔다. 죽음이 저희끼리 다투며 반복해서 산 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타다닥, 날갯짓 소리. 민은 눈을 크게 떴다. 나비 떼였다. 송장 나비가 날갯짓하고 있었다. _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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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