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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이 그랬어 ㅣ 트리플 1
박서련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평점 :

대략 10여 년 전에 쓰인 이 글들을 참 많이 미워했다. 십 대 시절 쓴, 그러니까 기술적인 면에서 훨씬 부족했던 습작들보다, 성인으로서 쓰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며 쓴 이 글들이 더 꼴 보기 싫었다. 쓴 사람의 자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데 그 자의식이 몹시 미숙한 한편 기를 쓰고 어른인 척하고 있음을 지나치게 잘 알아볼 수 있어서다. 스스로가 남겨둔 그런 태도를 미워하지 않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 (중략)... 이 책의 세 작품을 쓴 나와, 그것들을 고친 나는 분명히 연속적이고 동일한 존재지만 또 이토록 다르다. 너의 저의를 나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도저히 모르겠다 그런 마음으로,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쓰는 심정으로 소설을 고쳤다. 나는 원래 이 소설들의 저자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다시, 또는 처음으로, 공동 저자로 승인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_ 120~122p.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보아야지, 생각만 하다가 트리플이라는 단편집으로 박서련의 글을 처음 읽게 되었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의 세 권 모두 평이 좋았던 터라, 이 단편집을 읽기 전 기대치가 살짝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장편소설을 쓰기 전의 습작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읽으니 아...라는 끄덕임이 절로 따라온다.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 <호르몬이 그랬어> <총 塚> 세 편의 단편은 짧다. 참 짧다.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순식간에 읽어낼 수도 있지만, 간격을 두고 조금 띄어 읽게 되는 책이기도 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로 살짝 혼란스러웠는데 뭘까? 뭐지? 하면서도 읽어가다 보면 이야기의 윤곽이 점점 그 의미와 내용이 스며들듯 다가온다. 매력있는데?!
<트리플>은 한국 단편소설의 현장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로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에 모이는 흥미로운 시도로 '작가-작품-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을 기대하게 되는 시리즈다. 출간 예정된 은모든, 배기정, 임국영, 한정현 작가의 책들에서 어떤 단편들을 읽게 될지 기대가 된다.
"전리품을 빼앗기듯 처녀를 잃었다"라는 문장을 삭제했다. 하품조차 나오지 않는 문장이고, 아무리 한참 전 일이라지만, 내가 쓴 것이어서 냉정하게 생각하기가 어렵다. ... (중략)... 왜 그렇게 썼을까? 좀 까져 보여야 쿨한 것 같아서? 정말 까져 보이고 싶었다면 열여덟 살 때 했던 첫 섹스에 대해서 썼어야지. 어차피 소설이라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실제로 겪은 일에 대해 쓸 거였다면 첫 섹스를 오빠가 아니라 언니와 했다는 이야기도 했어야지. _ #다시바람은그대쪽으로
침대 위에 내가 두고 나온 종잇장은 지금쯤 피를 조금 먹었을까. 나는 거기에 내가 적어둔 문장을 떠올린다. 내가 아니야, 호르몬이 그랬어. 나오라는 토는 안 나오고 눈물이 울컥울컥 나온다. 구역질이 밀어낸 피가 허벅지를 타고 흐르며 식는다. _ #호르몬이그랬어
삭제하고 싶은 장면들이 오히려 더 뚜렷하다. 너의 죽음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나뿐인데도, 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너의 사망을 누군가에게 신고해야 했다. _ #총 塚
#호르몬이그랬어 #박서련 #자음과모음 #자모단2기 #트리플 #트리플시리즈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