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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조금씩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따위는 보지 않고도, 사과와 더불어 20년을 살아온 것만으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 같은 남자들이 대륙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짐작이 간다.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변명은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온갖 짓을 다 저지르고도 나중에 입을 삭 닦고 잘 살아간다. 인간이란 그런 동물이다. _41p.
시일까? 소설일까? 짧은 흐름을 이어가며 주인공, 주인공이 사랑하는 소녀 야에코, 아버지, 법사, 병풍과 사과밭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린 시절 야에코의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사망하게 되고, 그 사건이 있었음에도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사과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모녀. 화자인 '나'의 흐름으로 이어가는 이야기는 글에 등장하는 법사와 병풍의 변화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생각해 보게 되는데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다를 때 즈음 어.. 어...? 어!!!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 역시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다. 직장에서도 내쫓기고, 가족들에게도 내몰려 아무도 살지 않는 어린 시절 살던 고향에 내려와 인생의 후반기를 살겠다고 결정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담담하면서도 조금은 환상동화 같은 느낌이랄까? 주인공의 환상으로 보이는 세 명의 기마 무사와 노인, 그리고 그 노인을 부양하는 딸의 관계를 천천히 짚어가며 읽어보게 된다. 전체적으로 살짝 다운된 느낌의 글이고, 쉽게 책장을 덮을 수 없어 이 책을 옮긴이의 글을 읽어보고서야 앞의 내용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듯했던 글. 다시 읽어도 역시 인상 깊이 남았던 글은 <달에 울다>. 시의 함축성과 소설의 서사성, 천 개의 시어가 빚어낸 소설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던 글이 아니었나 싶다.
"잘 있어" 하고 법사는 중얼거린다.
바람 소리가 마치 칼 휘두를 때의 신음 같은 소리를 낸다. 초원을 헤쳐 가며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잘 있어"를 되풀이한다. 그렇게 그는 '어제'와 헤어져간다. 아마 날이 밝기 전에 바람과 풀, 달빛밖에 없는 황야를 가로지를 것이다.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는 분명 유랑을 그만두고 싶다. 그래서 사과밭 골짜기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비파와 승복을 태워버리고, 숨 쉬는 횟수를 반으로 줄이고, 여생을 사과나무에 맡길 작정일 것이다. _87p.
사람들은 잘 때마다 쇠약해진다.
그들은 매일 실컷 먹고 마시는데도 오히려 살아갈 힘을 잃어간다. 이제 그들에게는 누군가를 몰아붙여 숨통을 끊어놓을 터무니없는 힘조차 없다. 사람들은 죽지 않기 위해 살지도 않고, 살기 위해 살지도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_112p.
생각해 보면 겁에 질려 살아온 40여 년이었다. 잃는 게 두려워 분투했음에도 나는 차례차례 잃어만 갔다. 그러나 나는 많은 것을 잃었기에 나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내 주위에는 나밖에 없다. 나는 그런 나에게 눌리어 숨이 막혔다. _151p.
빼도 박도 못하던 날들은 이미 소멸했고, 나는 해방되었다. 이제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나 역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겠다. 더욱이 이런 상태라면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_155~1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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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