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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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스파이들은 회복할 수 없이 망가진 것들 때문에 울었다. 일 년도 안 된 지난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울었다. 이 모든 일이 어린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억울하고 가혹해서 울었다. _272p.


삼악산 남쪽 면을 복개해, 산복 도로를 만들며 생겨난 동네 삼악동. 긴 벌레처럼 보인다 하여 삼악동이라는 지명이 아닌, 삼벌레 고개 중간 즈음의 동네. 우물집 순분의 아들 은철과 이 집에 세 들어 사는 새댁네 안원의 비밀스럽고도 귀여운 스파이 놀이로 시작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비밀을 알아내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려내 복수를 하는 게 스파이의 임무라는 귀여운 아이들의 놀이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평화로운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듯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파사삭 부서져버린다.


아이가 감당하기에 커다란 사고, 그저 흘려들을 수도 있던 말이었지만 어둠 앞에 선 순간 그 말들이 해일처럼 덮쳐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은철과 원이의 스파이 놀이로 몽글하고 통통 튀는 분위기로 시작한 글은, 점점 어두운 굴로 나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는 듯한 기분으로 따라가게 된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예고 없이 들이닥친 불행을,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고통을 오롯이 안고 살아야 하는 시간도 지나가겠지, 그 후의 삶이 궁금해진다. 책장을 덮고도 한동안 깊은 상처만 남은 우물집의 잔상이 남는 글이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내 몸에서 나온, 그 어린 고통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늘 실패하고 정지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걸.

그리하여 오늘도 미완의 다리 앞에서 직녀처럼 당신을 기다린다는걸. _ 권여선


"잘 들어. 스파이는 말이야."

은철은 풍선껌을 파낸 쪽 귀를 기울였다.

"비밀을 알아내는 사람이야."

"응, 비밀을."

"스파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사람 얘기를 엿들어야 해." _48p.


"귀 발 귀 술?"

"그렇지"

"아, 참 재미있는 말이네요. 귀발귀술. 귀발귀술."

조용히 앉아 있던 은철은 킥킥 웃었다. 하지만 귀발귀술 때문에 웃은 건 아니었다. 은철은 조금 전에 배운, 이름을 반 갈라 두 개로 만드는 일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아빠는 만자 춘자, 엄마는 순자 분자, 형은 금자 철자, 통장 집 식모는 막자 달자, 통장집은 언자 년자, 큰형님은 정자 자자... 은철은 웃겨서 살 수가 없었다. _65p.


"그 죄를 다.... 어떻게 받으려고....."

이즈음 순분의 머릿속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는 생각은, 두어 달 전에 계원들 앞에서 앉은뱅이가 된 새댁네 시누 얘기를 늘어놓던 일이었다. ... (중략)... 자기가 내뱉은 말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순분은 잊고 있었던 시렁 위의 유리그릇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_212~213p.


"무서운데 멈출 수가 없어요. 저놈들이 멈추지 않으면 우리도 멈출 수가 없어요." _269p.


순분은 두 아이를 안고 눈물을 훔치면서 원이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을 생각했다.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다고 했지. 눌은 놈 덜 된 놈 찔깃한 놈 보들한 놈. 순분은 그게 마치 사내들에 대한 형용 같다고 생각했다. 서슬이 퍼래서 당장 빨갱이 집을 쫓아내자고 설치고 다니는 통장 박가 같은 놈은 어떤 놈일 것이며, 밤마다 불안감에 사로잡혀 새댁네를 어떻게 내보낼 수 없을까 궁리하는 자기 남편 같은 놈은 어떤 놈일까. 같은 놈일까 다른 놈일까. 눌은 놈도 덜 된 놈도, 찔깃한 놈도 보들한 놈도, 어차피 그놈이 그놈 같았다. _272~2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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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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