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얼지 않게끔 새소설 8
강민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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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서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죠.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어쩌죠. 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 겨울, 서른세 번째의 겨울에 떠나도록 되어 있는 시한부 인생이었다는 걸 모르고 살아온 것이라면 어쩌죠." ... (중략)... 따뜻한 와인을 연거푸 마신 것같이, 몽롱한 어지럼증이 온몸을 잠식한다. 이런 마지막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부디, 다시 눈뜰 수 있기를.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기를. 그래서 내가 겨울을 버텨낸 이유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우리가 만난 행복한 여름을 다시 경험할 수 있기를.

나는 눈을 감았다. _196~200p.


어느 여름, 인경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된 희진은 인경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사무실에서 유독 더위를 타고 한 겨울에도 패딩 입은걸 거의 본 적이 없어 '독특한 사람'으로 통하는 희진은 더위에 유난히 약한 타입이라 에어컨, 선풍기 등 끼고 사는데.. 이와 달리 인경은 한여름에도 땀을 흘리지 않는 체질이었던 것. 언제부터였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생긴 변화에 당황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체질을 가진 이들이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상 깊었다. 어색한 직장동료 사이였던 인경과 희진은 인경이 '변온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인경을 돕고자 하는 희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한 개인에게 닥친 거대한 재난과도 같은 상황을 연대하여 통과하는 인경과 희진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섬세하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감정들은 그녀들의 연대를 응원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겨울은 유독 힘든 계절이 되었다. 유난하게도 손발이 찬 수족냉증이 있는 데다, 여름은 그런대로 버티지만 겨울의 추위엔 옷을 아무리 껴입고 난방 기기들을 끼고 있어도 속수무책으로 살을 에는듯한 찬 바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기분이라, '겨울에만 따뜻한 나라에서 살다 와도 좋겠어'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곤 한다. 책장을 덮고 고개를 드니 창밖엔 함박눈이 쏟아져 온통 하얀 눈 세상이 되어있다. 긴 겨울을 무사히 견뎌 따스한 봄이 왔을 때, 조금도 얼지 않은 채 깨어나기를...


"대리님, 그거 맞죠? 파충류나 양서류 그런 종류요. 땀도 안 나고 온도에 따라 체온도 변하고 하는, 그거 뭐더라, 그거요, 대리님."

변온동물.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_33~34p.


"희진 씨는 참 신기해요. 어떻게 이런 상황들에 그렇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궁금하고. 이렇게 맹목적으로 도와주시는 것도 제 입장에서는 참 신기하고."

그리고 고맙고요. 희진에게서 시선을 떼며 나지막이 혼잣말 비슷한 것을 덧붙이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서바이벌을 표방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나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_75p.


"참 이상하죠, 저는 더운 게 싫을 뿐인데, 싫은 건 이유 없이 그냥 싫은 건데 사람들은 뭔가 늘 이유가 있고 숨겨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캐내는 걸 유난히도 좋아하고요. 비밀을 파헤치는 탐정 만화의 주인공들도 아니면서, 정말." _77p.


웅웅거리는 기계에서 부드러운 보라색 크림이 옅은 갈색의 콘 위에 둥글게 올려지는 것을 보고 있던 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두 뺨을 지나쳐 등줄기를 타고 다리로 흘러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목덜미 뒤편으로 올렸다. ... (중략)... 방금 옷깃을 타고 몸 안쪽으로 흘러들어오는 그 바람은 여름의 것이 아니었다. 따뜻하고 더운 느낌이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 친구가 장난으로 눈과 얼음을 목 안쪽으로 흘려보냈을 때의 기분, 양팔을 비틀어가며 그 차가운 덩어리들을 몸 밖으로 털어내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허리 깊숙한 곳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이런 두려움을 최근에 느껴본 적이 있던가. _130~131p.


"그래도 겨울은 추운 게 좋겠어요. 겨울에만 살아 있는 동물들도 있을 텐데. 나는... 겨울에 이렇게 자도 되니까요." _1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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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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