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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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선아는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그녀에게 벌어진 일, 기분, 수치심 그러니까 모멸감, 행복, 거듭해서 기억하고 싶은 일, 잊지 않고 싶은 일. 귀에 들리는 모든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그녀는 그렇게 매일 글을 썼다. 일기는 그녀가 많은 것을 견디게 한 수단이었다. 그녀는 이 방법, 그러니까 바닥으로 완전히 가라앉지 않을 수 있게 이 방법을 알려준 그 친구, 김지우에게 감사했다. _32p.

휴대하기 좋은 사이즈, 포켓북 사이즈의 작은 책이지만 글꼴, 글의 간격 등 눈이 편안한 배열로 눈의 피로감도 거의 느낄 수 없는 책이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의 8번째 책은 강화길 작가의 「다정한 유전」. 이 책을 읽기 전 sns에 올라오는 문장들을 종종 읽게 되곤 했는데, 문장의 결이 좋아 궁금했던 책이기도 했다.

진영과 민영, 지우와 선아의 이야기는 닿을 듯 닿지 않으면서 교차로 진행된다. 작은 시골마을,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민영은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있던 진영조차도 그 마을을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진영의 이야기에 아연해진다. 소설가였던 친구 지우의 실종, 친구의 권유로 감정을 갈무리하듯 혼자만의 글을 쓰기 시작한 선아. 스위치를 오가듯 교차로 진행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서로 닿을 듯 닿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외롭고 힘겨운 마음들이 문득 손에 닿을 듯 멈칫거려지기도 한다. 퍼즐을 맞춰가며 읽는 듯, 읽다가 앞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 즈음, 작가노트에 쓰인 한 문장처럼 마지막 이야기, 결말은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장을 더듬어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위로하고 싶은 글이었던 강화길 작가의 「다정한 유전」 발췌해둔 문장들도 필사해두어야겠다.

"뭐가 다른데? 이런다고 네 인성이 달라질 것 같니?"

서로를 돌보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통은 함께 경험한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_17p.

"그래. 이 마을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민영은 전혀 그런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다. 진영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녀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정말로 괜찮았다. _39p.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은 나 자신을 쓸모없다고 느끼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내 문제를 아는 것도 편치 않았다. 누군가는 불쌍하다는 말을 쉽게 했고, 또 누군가는 삶이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소리를 지껄였다. 그러면서도 어쨌든 자신들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아 다행이라고 느끼는 것이 눈에 보였다. _87p.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는 물었다. 여자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 어떻게 몰라요?" _103p.

'그건 그냥 그 아이의 운명이라고 봐야겠지.' 그런 문장들이 좋았다. '그런 운명을 끊어내는 것이 또 다른 운명이겠지.' 문장과 문장으로 이어진 긴 이야기들이 좋았다. 나는 인물들의 마음을 공감하면서도,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곤 했다. 그들의 슬픔과 분노가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마음껏 그들의 이야기에 심취할 수 있었다. _135p.

병에 걸린다는 건, 타인에게 내 행복을 맡겨둔 것과 같다. 살아 있는 순간에 감사하고 모든 것이 소중해지는 순간에도, 통증은 불현듯 찾아온다. 변덕스러운 사랑처럼. 그러면 나는 무너진다. 내 의지가 아니라는 것. 내 선택과 잘못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유약한 마음에 내 인생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난다. 왜 하필 나야? _1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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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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