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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평점 :

어둡고 긴 방랑길 위
빛나는 저녁달처럼
서로의 구원이 된 두 사람의 이야기
독특하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던 사라사.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시간이 깨지고 이모의 집에 살게 된 사라사에겐 되도록이면 들어가고 싶지 않은 집이었다. 제발 귀가시간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최대한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들어가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오고 그도 찾아왔다. 친구들과 놀던 놀이터, 매일 같이 책을 읽으러 오던 남자는 때론 책을 읽기도, 뛰어노는 아이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기도 하던 남자였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비를 맞고 앉아 있던 사라사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말을 건네던 남자. 가방도 놀이터에 놓아두고 무작정 그를 따라간 사라사와 후미의 두 달간의 동거.
세상의 상식으론 그는 소녀를 데려가지 않았어야 했다. 한동안 외출하지 못했던 사라사와 후미의 동물원 나들이. 이 나들이가 이들의 일상을 뒤흔들고 후미에겐 소아성애자 납치범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주변 사람들에게 찍힌 이날의 영상이 15년이 흘러 성인이 된 사라사에게도 흔적으로 남아있게 되는데...
9살 소녀와 19살 소년은 15년의 시간이 흘러, 우연처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후미를 잊은 적 없었던 사라사는 남자로서 가족도, 남자도 아닌 존재로 있는 그대로의 후미를 갈망하게 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들의 만남은 사람들의 눈엔 기이해 보일 수밖에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인 채로 이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디지털 세상이 일상이 된 오늘, '디지털 인두'라는 화제와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볼 것인가, 개개인이 보고자 하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인가. 타인의 인생에 이렇게나 잔인한 잣대를 드리워도 되는 것인가, 등등 생각이 많아지는 글이기도 했다. 외로움을 표현한 문장들이 마음을 사로잡아 책장을 쉬이 덮을 수 없었던 <유랑의 달>. 관계를 정의하는 많은 단어, 사랑의 유형을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었다. 여운이 길게 남아 손꼽는 소설로 추천하고 싶은 책!
고립무원한 환경에서 혼자 자기주장을 펼치며 살 만큼, 나는 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상식 있는 아이처럼 행동했다. ... (중략)... 그런 이유도 모른 채 나는 규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무한히 이어지는 나날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하여. _25p.
"그럼.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는 없는걸." _44p.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혐오의 눈빛은 피해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고 아연했다. 위로나 배려라는 선의의 형태로 '상처 입은 불쌍한 여자아이'라는 도장을,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쾅쾅 찍어댄다. 다들 자기가 상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분명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내게 상처를 준 건 후미가 아니다. 다카히로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태평하게 대학까지 졸업해서 취직하고, 지금도 착한 사람인 척 살고 있겠지. _84p.
오래전부터 내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배려라는 쓸데없는 필터 덕분에 그냥 웃고 있어도 '억지로 참는 거 아냐?',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트라우마 있는 거 아냐?'라는 취급 주의 딱지가 붙었다. _120p.
포도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그러나 포도는 아닌 모조품 냄새. 애정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세상에 '진짜 사랑' 따위 얼마나 있을까?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것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진짜가 아니란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다들 내버리진 않는다. 진짜는 세상에 그리 자주 굴러다니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기가 손에 든 것을 사랑이라고 정의 내리고, 거기에 순응하자고 마음먹는다. 그런 것이 결혼인지도 모른다. _163~164p.
어떤 아픔이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내 손에도, 모두의 손에도 하나의 가방이 있다. 아무도 대신 들어줄 수 없다. 평생 자기가 안고 가야 할 가방 안에 후미의 그것이 들어 있다. 내 가방에도 들어 있다. 내용물은 다 다르지만 버릴 수는 없다. _236p.
우리는 부모도 아니고, 부부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친구라고 하기도 어렵다. 우리 사이에는 말로 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지만, 무엇으로도 우리를 단정 지을 수 없다. 그저 따로따로 혼자 지내며, 그러나 그것이 서로를 무척 가깝게 느끼게 한다.
나는 이것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다. _283p.
더할 나위 없이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해도, 나는 후미와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하물며 자고 싶다는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는다. 후미와는 그저 함께 있고 싶을 뿐이다. 그런 기분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_294p.
나와 후미의 관계를 표현할 적당한 말, 세상이 납득할 말은 없다.
거꾸로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산더미처럼 많다.
우리가 이상한 걸까.
그 판단은, 부디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미 거기 없으니. _3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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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