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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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은 프리즘을 조심스레 집어 들어 흰 벽에 대고 햇빛을 통과시켰다. 작은 조각이 뻗어내는 아름다운 빛깔. 길고 짧은 파장의 빛이 벽 위로 자연스럽게 용해되어 색깔은 분명하지만 색간의 경계는 흐릿한 부드러운 무지개를 만들어낸다.

누가 내게 다가온다면 난 이렇게 반짝일 수 있을까.

또 나는 누군가에게 다정하고 찬란한 빛을 뿜어내게 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빛내주는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의 속성이 있다면 시작한다는 것, 끝난다는 것, 불타오르고 희미해져 꺼진다는 것. 그리고 또다시 다른 얼굴로 시작된다는 것. 그 끊임없는 사이클을 살아있는 내내 오간다는 것. 그렇게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 뜨거운 도시의 거리 위에서, 한겨울에도 늘 여름인 마음속에서, 태영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우주가 점이 되어 소멸하는 그날까지. _260~261p.

이 이야기는 2018년 여름부터 2019년 가을까지 <Axt>에 '일종의 연애소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이다. 자신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장소에서 매일 마주치게 되는 사람을 마음에 담게 되는 여자, 누군가와의 시작을 생각하면서 이미 끝을 시작한 남자, 포커페이스에 능숙하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여린 여자, 그리고 누군가와 얽히는 게 싫은 남자.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때론 나의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은 문장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오롯이 나로 빛나는 사람일 수 있을 때, 누군가를 위해서도 반짝이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소설은 이들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어떻게 끝맺음을 해야 할지 읽는 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출간을 앞두고 개작을 하면서 코로나 시대를 반영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마스크'하나 썼을 뿐인데, 우리는 순간에 반한다는 것에 대한 기회를 이미 박탈당했다. 요즘은 영상통화로 소개팅을 한다는데, 이런 시대가 올 줄이야....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는 2020년,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이야기를 읽어가게 될까? 문장을 더듬어가며 아껴읽고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던 <프리즘> 저자의 글로 마무리한다.

세상은 수상하고 위험하지만 그보다 더했던 시절에 늘 앞서 존재했고 인류는 그 시간을 모두 지나쳐왔다. 그러니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마음을 아끼지 말자.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도. 누가 뭐래도 지금은 사랑하기에 더없이 걸맞은 때다. 그렇게 믿어본다. _ 손원평

뜻도 맥락도 알 수 없는 분절된 말들. 그 단어들을 모두 모아 문장을 만들면 어떤 의미가 될까. 의미 없는 낙서 같은 단어의 나열일 뿐일까, 아니면 아주 우연히 멋지고 아름다운 문장이 될까. _10p.

사랑이 끝나고 나면 예진은 늘 처음으로 돌아가 기억을 곱씹곤 했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 비밀스런 우연을 운명이라 느꼈던 시작점, 수줍은 마음이 불타오르던 순간들, 차츰 무언가가 변해가고 마침내 사소한 일마다 성내는 상대방을 보는 어떤 날, 퇴색해버린 마음을 질책하고 추궁하고 끝내 낯모르는 행인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야 마는 때. 그리고 지쳐버린 어느 날의 예감했던 이별. 사랑의 끝은 한결같다. 아니 천편일률적으로 괴롭고 찜찜하다. 완전히 악질적이다. _117p.

심심함과 외로움의 차이란 뭘까.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인가. 짧고 긺의 차이인가. 깊고 얕음의 차이인가. 그렇다면 역시 나는 깊이가 없는 사람인 걸까. 아니면 쉽게 마음을 작동시켜버리는 가벼운 사람인가.

...(중략)...

예진은 스스로도 헷갈렸다.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한 걸까. 사실은 이별과 상실을 잊고 그저 ‘새로운 설렘’이라는 감정에 빠져 있는 게 즐거웠던 건 아닐까. 영원할 것 같던 여름은 어느새 스르륵 밀려나버렸고 날마다 성큼성큼 가을이 짙어지고 있었다._118~120p,

행복했던 순간들은 왜 과거가 되면 슬퍼지고 마는 걸까. 사랑도 영원도 거짓된 명제임이 드러났을 뿐이다. _148p.

나는 누구와 연결돼 있을까.

언제 어디서 누구와 연결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단 하나. 언제고 끊어질 수 있는 관계를 수없이 맺으며 살아가게 될 거라는 점이다. _2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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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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