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 김솔 짧은 소설
김솔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5월
평점 :

나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굳게 닫힌 문은 침묵처럼 틈 없이 단단했고 어둠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문을 두드리는 순간 모든 기억이 산산이 부서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문 안쪽이 스스로 밝아지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딱히 그곳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딱히 찾아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젊음은 모든 생각과 행동의 완벽한 알리바이가 됐으므로 몇 차례의 사랑에서 시래했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누구의 삶이든지 간에 그것을 짊어지고 걸어간 것은 기묘한 상처들이었고 그것들이 쓰러진 곳에서 잠시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니까. _304p.
<김솔 짧은 소설>이라는 저자명이 눈길을 끄는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은 다양한 인물, 국적과 장소를 넘나드는 40편의 짧은 이야기다. 소설 속 인물들은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삶의 균열의 틈으로 포착한 경험하지 못한 이변의 세계를 감지해 써 내려간 글은 짧지만 단숨에 몰입하게 하는 집중력이 뛰어나다. 미지의 세계, 인간세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나, 설명되지 않을 이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에 쉽게 동화되고 상상 속에 빠져들게 된다.
김솔 작가의 끊임없이 잔잔한 일상을 흔드는 '시도'의 기록이기도 한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단편소설은 집중이 잘되지 않고 호흡이 짧아 끊기는듯한 느낌이 싫어.' 서 읽지 않는다고 자주 이야기 해왔는데, 최근 읽는 단편소설들은 이런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 잠시 일상을 떠나 여행을 하듯 때론 몽환적이고, 발랄하게 여행하듯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회중은 자신들을 코끼리라고 폄하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제히 코를 뻗어 주변에 널린 똥 덩어리와 나뭇가지를 그에게 집어던졌다. 그 행동만으로 분을 삭이지 못한 자들을 일제히 엄니를 쳐든 채 마치 허공을 통째로 옮기려는 듯 날뛰었다. 한낮의 소란에 깜짝 놀라 점심 식사를 중단하고 공터로 돌아온 사육사들이 채찍과 갈고리를 휘두르면서 코끼리를 제압하려고 애썼고, 이 볼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서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폭죽처럼 터뜨렸다. _35p.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허감을 지니고 산다. 특히 자의식으로 무장한 예술가들에게 일상은 외줄타기와 같다. _174p.
"아프리카에 살지 않는 동물 중 하나가 바로 호랑이래요. 그래서 잘 기억해두려는 거예요." _256p.
#살아남은자들이경험하는방식 #김솔 #짧은소설 #김솔짧은소설 #신작소설 #단편신작 #인생 #관계 #몽상 #망상 #철학 #아르테 #arte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