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 이야기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고아 이야기』는 전기가 아니다. 한때 이름을 날린 서커스 단원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한편의 소설이다. 서커스 곡예의 본성과 그들의 삶의 방식 그리고 전쟁 중에도 계속된 서커스 곡예처럼, 나 역시 작가로서 대단한 자유를 누리며 작품을 집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 과정에서 접한 실제 인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고백하고 싶다. 독일 군대에 쫓기는 와중에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렌느와 피터,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지켜 낸 서커스 단장 아돌프 알토프 그리고 나치 경찰들이 유대인을 수색하러 찾아올 때마다 사용한 기발한 은신 방법 등 모든 것이 이번 작품을 집필하는 데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작가 인터뷰 중에서

독일군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집에서 쫓겨난 노아, 사랑만 믿고 결혼한 독일군 남편에게 총통의 명령이라며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이혼 통보를 받은 아스트리드. 고향을 찾은 아스트리드는 가족들이 떠난 동네에서 동종업계의 노이호프 씨 서커스단에서 다시 공중그네를 타게 되고, 이렇게 같이 떠돌다 보면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신이 낳은 아이는 아리아계 순혈이라는 이유로 독일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혼자 기차역에서 청소 일을 하며 살아가던 노아는 우연히 역에 정차한 화개 열차 안에 버려진 것처럼 놓인 아기들을 보게 된다. 얇은 옷 한 겹만 입은 아기들은 대부분 얼어 죽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 사이에서 노아와 눈이 마주친 아이를 안고 도망치게 되는데...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의 큰 흐름 속에 진행되는 「고아 이야기」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버림받은 두 여인의 이야기를 릴레이처럼 이어가며 이야기하고 있다.

「고아 이야기」를 다 읽고 다시 보는 책표지는 참으로 아련하고 애틋하다.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주며 생계를 이어갔던 독일 서커스단의 뛰어난 공중곡예사인 아스트리드, 테오와 자신을 위해 서커스에서 공중그네를 타야 했던 노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유대인을 서커스 단원으로 위장시켜 보호한 노이호프 단장. 하루하루 급박한 상황을 살아가는 두 여인의 비밀과 우정은 이야기의 후반으로 달려갈수록 페이지 넘김을 멈출 수 없이 속도감을 더한다. 긴박한 순간들을 넘기며 살아가야 했고,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두 여인의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한 여운으로 남아 실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한 여운을 남긴다.

갓난아이의 머리가 다른 아이들 사이로 삐죽이 솟아 있었다. 하트 모양의 얼굴은 지푸라기와 대변 찌꺼기로 뒤덮인 상태였다. 하지만 아이는 고통스럽거나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이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힘들게 뱃속의 아이를 출산한 그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석탄처럼 까만 눈동자, 순간 심장이 복받쳐 올랐다. _24p.

"상부에서 유대인과 결혼한 장교들에게 이혼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 남편의 설명이 이어졌다. ... (중략)... 어디로 가라는 건가? 우리 가족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당장 독일 밖으로 도망칠 수 있는 통행허가증조차 없지 않은가? 나는 얼이ㅣ 빠진 채로 여행 가방을 꺼내서 휴가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짐을 챙겼다. 가방에 뭘 챙겨야 할지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_41~43p.

"진정한 공중곡예사가 되려면 평생 피나는 연습을 해야 돼. 그만큼 노력해야 관객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거야. 서커스는 마법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어. 우리가 선보일 공연이 전부 진실이라고 믿도록 만들어야 하니까." _85p.

그네 손잡이에 매달려서 무력하게 앞뒤로 몸을 흔들고 있는데, 연습실 복도의 높은 창문 너머로 지평선의 일부가 살짝 눈에 들어왔다. 저 언덕 너머로 갈 수만 있다면 독일을 벗어나서 자유와 안전을 보장해 줄 출구를 찾을 수 있을 텐데. 테오와 함께 이 공중그네를 타고 저 멀리 날아가 버릴 수만 있다면! 순간 머릿속에 번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서커스단을 따라서 프랑스로 가는 거야. _113p.

“바보들이나 두려워하디 않는 거야. 힘든 상황일수록 두려움을 놓지 말아야 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러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기를 바랐어. 우리 아버지도 나를 공중에서 떠민 적이 있어. 네 살 때.” ... (중략)... 우리 둘 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나는 부모님에게, 아스트리드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셈이니까, 게다가 가족을 잃었다는 점에서도 똑같았다. 어쩌면 우리는 어느 면에서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_134~135p.

"언젠가 생각이 바뀔 때가 올 거야.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인생은 생각보다 짧은 법이니까." _205p.

최근까지만 해도 서커스는 포탄이 오가는 전쟁에서 유일한 안식처였다. 마치 외부에서 벌어지는 세상사와 동떨어진 하얀 눈이 날리는 스노볼 세상처럼. 하지만 그 벽마저 금이 가서 부서지기 직전이 되어 버렸다. 다름슈타트에서 프랑스에 도착하면 안전해질 거라고 말했을 때 아스트리드가 보인 반응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그 어느 곳도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_266p.

#the_orphans_tail #Parmjenoff #고아이야기 #팜제노프 #정윤희 #잔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독서스타그램 #사진앱추천 #call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