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
한유석 지음 / 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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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진 못하지만 술자리를 정말 좋아한다. 사회 초년생일 때도 모임, 회식자리를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마지막까지 남아 멀쩡한 정신으로 취한 이들을 챙기곤 했다. 매일 마시면 주량이 는다고들 이야기하길래, 문득 생각날 때면 최선을 다해 마셔보기도 했다. 하지만..... 알코올분해 성분이 전혀 없는 체질인 건지...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턴 그 조차도 시도하지 않았고 이번 생은 술을 마시진 못하지만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다.

술에 대한 로망, 미련이 많아서인지 술에 관련한 책을 궁금해하기도 한다. 술을 즐기는 이들의 글은 왠지 더 풍성하게 느껴지니까... 광고 크리에이터 한유석의 술에 관한 이야기들은 지나온 시절의 사람과, 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과 함께 했던 술, 그리고 이야기들은 때론 그들에게 하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때론 울컥하기도 하면서 그 자리에,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은근 부럽기도 했다. 한두 잔,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지만... 슬프거나 힘들 때도 찾게 되는 술. 종류도 다양하고 음식, 분위기, 자리에 따라 선택을 달리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닌 술의 다양했던 이야기는 책장을 넘기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들이 떠올랐고 취하는 듯한 기분에 기분이 좋아지는 글이었다. '술'만이 아닌 곁에 머물고 싶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021p.

사람, 책, 음악 등 무언가를 만나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는 일이 있다. 내게는 기네스가 그랬다. 상쾌함으로 맥주를 마셨는데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암흑 같은 블랙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드러운 크림을 앞세우고 온 그날,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나를 평생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중의 하나가 되겠구나. 나는 맥주의 전혀 다른 세상을 보았고, 그래서 기네스는 그날부터 맥주가 아니라 고유명사. 기네스였다.

049p.

서른을 넘게 되면 자신의 삶이 지겨워지게 된다. 취미생활, 또는 일상의 일탈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약발이 안 먹히게 되는 순간이 종종 온다. "벗어나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무거워, 무거워"를 온종일 되뇌게 되는 날이 생긴다. ... (중략)... 술과 여행은 지평선을 닮아가는 일상에 지지 않는 힘이 되었고, 지치지 않고 오래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비밀이자 비법이다.

116~117p.

인생의 단 한순간이고, 단 한 지점이다. 일상을 살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어도 밤이 오면 떠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떠돌 수밖에 없어 어른이 된다. 떠나온 그 순간. 그곳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어 노래가 된다. 때로는 돌아갈 수 없어 쩔쩔매고, 돌아갈 수 없어 목이 멘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어 새로운 길이 된다.

우리는 떠나왔기에. 그립기에 자꾸 말을 건넨다. 지칠 때, 부끄러울 때, 상처를 받았을 때, 아니면 기쁠 때, 스스로를 칭찬할 때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지 유심히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떠나온 그 순간의 내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 곁을 지키고 있다.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마음의 말 상대가 되고, 늘 안아준다. 다독여준다. 품이 되어준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세상의 위로와 용서가 아니라 떠나온 나의 위로와 용서이다.

139p.

자신의 깊이를 가진 술을 만나게 되면 부끄러워진다. 몇천 원하는 술마저도 자신의 세계가 있는데, 사람으로 자신의 세계를 고민하지 않는 부끄러움으로 조급해진다.

289p.

악마가 사람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때 대신 보내는 것이 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술이 인간사에 수많은 해악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제대로 만드는 술에는 자연이 또 다른 차원의 형태로 사람의 즐거움과 위로가 되겠다는 바람이 담겨 있다. 그러하기에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 나에게 오기까지의 그 시간에 대한 예의로 술병과 눈인사는 나누어야 한다. 처음 만나는 술은 어떤 맛과 향. 어떤 기운이 느껴지는지 한동안 입에 머금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는 시간, 시간은 사라지고, 몸으로 그 시간을 지나듯 좋아하는 술과는 그렇게 몸으로 교감하는 것이다. 취기로 제대로 술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순간 멈추는 절제도 필요하다.

302p.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무릎걸음 같고, 기도 같아서 멋진 일이다. 사는 일도 경계를 넘는 시기가 온다. 삶의 후반기에 온 나는 멀지 않은 언젠가, 삶의 전반기를 꼭 안아줄 생각이다.

379p.

술은 인생을 거스르는 마법이다. 술로 지금의 내가 이전으로 돌아가 그때의 나를 만나고 위로한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으로 거슬러가, 그 시절에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 문밖의 나를 문안으로 들인다. 서러워 울었던 눈물 자국을 닦아주고, 서성이다 지쳐버린 발을 씻어준다. 마음의 중심이 커지면 제대로 길을 가는 것이고, 중심이 작아지면 틀린 길을 가는 것이라 일러준다. 지는 일에 축 처진 뒷모습에 "지면 또 어때"라고 토닥인다. 이전의 고단한 내가 웃어준다. 지금의 내가 웃어준다. 말간 아침이 기다리고 있다.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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