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일매일 좋은 날
모리시타 노리코 지음, 이유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삭삭삭" 마음의 균형을 찾아주는 따뜻한 울림
고교시절 예절원에서 다도를 체험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다. 한복을 갖춰입고 예절원 선생님의 지도하에 다기를 다루는 과정은 꽤나 지루하고 답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잠깐의 체험을 위해 한복을 갖춰입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차 한잔을 마시는 과정이 그 당시엔 불편하다. 라는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매일매일 좋은날>을 읽으며 그 당시의 어렴풋했던 시간들이 꽤나 도움이 되었다. 조금 더 커서 제대로 된 다도를 접했더라면 시작하는 마음이 조금은 달랐을까?
매주 토요일 오후, 나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한 집으로 향한다. 그 오래된 집의 문 앞에는 커다란 팔손이 나무 화분이 놓여 있다. 삐그덕, 문을 열고 들어서면 현관 바닥은 물에 젖어 있고 숯 냄새가 난다. 정원 쪽에서는 희미한 물소리가 졸졸졸 들려온다. 나는 정원을 마주하고 있는 조용한 방에 들어가 다다미에 앉아 물을 끓이고, 차를 타고, 그 차를 마신다. 오직 그것만을 되풀이한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대학교 때부터 25년 동안 다도를 계속해 왔다. /서문
대학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다도를 40년이 넘게 해오고 있는 저자 모리시타 노리코의 에세이는 그녀가 다도를 시작하며 직접 경험한 시간들을 담고 있는 글이다. 짧은 호흡의 글로 이어진 에세이는 '차'를 마시기 위한 시간과 과정이 우리의 인생과 얼마나 유사한지 이야기하고 글로 읽는 다도실의 풍경, 차를 마시기 위한 과정, 날씨,감정등은 글의 묘사만으로 충분히 상상이 되는 글이었다. 그날의 분위기, 기분, 차의 맛과 향, 사람들을 표현하는 저자의 표현력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글 앞에 바짝 다가 앉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는데, 아마도 긴 시간 차를 접하면서 오랜 시간 고민하고 마주 앉아 있으면서 쌓아온 자연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이유 같은 건 상관없으니까 어쨌든 이렇게 해. 너희들은 반발심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다도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
다케다 아주머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의외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때 다케다 아주머니는 어째선지 무척 그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차라는 건 그런 거야. 이유가 어떻든 상관없어, 지금은.”/p043~044
절을 한다는 것은 그저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르 숙이는 단순한 움직임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형태’ 그 자체가 ‘마음’이었다. 아니, ‘마음’이 ‘형태’가 되어 있었다.
이런 것이었구나. 이제까지 몇 번이나 다케다 선생님이 절하는 모습을 봐왔지만, 그때 처음으로 엄마가 말했던 ‘결이 다르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p084
"실수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제대로 하도록 해.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제대로 마음을 담는 거야." /p166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묻는 의문에 이유 같은 건 상관없으니 그냥 하라는 대답에 의아했지만 페이지를 넘기고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읽다 보면 이내 그 시간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고즈넉한 차 한 잔의 시간이 아닐까? 화려한 볼거리가 있어야 하는 오늘날의 차 문화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이런 곳에 다녀왔다.'라는 흔적을 남겨주기 위한 볼거리가 있어야 하는 문화로 바뀌어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가 꽤 오랜 시간 다도를 할 수 있었던 건 그런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공간과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고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비는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숨 막힐 듯한 감동 속에 있었다. 비 오는 날에는 비를 듣는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몸이 갈라질 듯한 추위를 맛본다. 어떤 날이든 그날을 마음껏 즐긴다.
다도란 그런 '삶의 방식'인 것이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인간은 고난과 역경을 마주한다 해도 그 상황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p256~257
다도란 계절의 순환 주기에 따른 삶의 미학과 철학을 자신의 몸으로 경험하며 깨닫는 일이었다. 온전히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 올 때마다 그것은 나의 피와 살이 된다. 만약 선생님이 처음부터 전부 설명해 주었다면, 기나긴 과정 끝에 마침내 스스로 답을 찾아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여백'을 남겨 주었던 것이다. /p265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당시엔 보이지 않았지만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면서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니, '아 그랬었구나.' 하는 시간들이 있다. 휘청거리는 그 순간들은 마음의 균형을 잃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탁탁탁!, 사사삭, 보글보글, 졸졸졸... 다실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작은 소리와 차를 만들기 위한 유려한 동작들은 어쩌면 계절을 느끼며 마음을 마주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처럼 매주 토요일, 차를 마시기 위해 시간을 보낸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 조용하고 정갈하게 차 한 잔을 만들어 마실 수 있는 시간, 작은 물소리가 흐르고 그날의 족자가 걸려있는 공간이 있다면 아주 가끔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정여울 작가님의 추천사로 서평을 마무리해본다. 아무리 지치고 힘든 날이라도 차와 함께하는 고요한 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괜찮아질 것만 같다.
세상에는 ‘금방 알 수 있는 것’과 ‘바로는 알 수 없는 것’ 두 종류가 있다.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한 번 지나가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바로 알 수 없는 것은 펠리니 감독의 <길>처럼 몇 번을 오간 뒤에야 서서히 이해하게 되고,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 간다. 그리고 하나씩 이해할 때마다
자신이 보고 있던 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차’라는건 그런 존재다. ...(중략)...
삶이 버겁고 힘들 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를 잃었을 때, 차는 가르쳐 준다.
“긴 안목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라.” / 서문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