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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왕이 온다 ㅣ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오면 절대로 대답하거나 안에 들여선 안 돼"
사실 즐기는 장르가 아니라 첫 페이지를 펼치는 게 정말 어려웠다. 읽을까 말까를 책을 펼치기도 전에 10번도 넘게 고민했던 책이었다. 읽으려고 들었다가도 내려놓기를 몇 차례. sns에 올라오는 리뷰 몇 편을 슬쩍 보고 피가 낭자하는 호러물은 아닌 것 같아 눈 딱! 감고 펼쳐 읽기 시작했다.
회색 그림자는 계속 서 있었다. 유리가 울퉁불퉁해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윤곽이 일그러지고 표면이 선명하지 않아서 뒤틀린 회색 덩어리로만 보일 뿐이었다. 돌연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망상에 빠진 것이다. 문을 열면 유리문 너머로 본 것처럼 일그러진 회색 덩어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서 있는 게 아닐까. /p15~16
"그게 오면 절대로 대답하거나 들여보내선 안 된다고. 현관으로 오면 문을 닫고 내버려 두면 되는데 뒷문으로 오면 위험하다고, 뒷문을 열면 끝이라고. 잡혀서 산으로 끌려간다고. 정말로 끌려간 사람도 굉장히 많다고 말이야." /p23
방문자 / 소유자 / 제삼자 어린 시절 기묘한 일을 경험한 히데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외할머니는 외출하시고 거동이 불편한 외 할아버지와 둘이 집에 남아있는데 누군가 방문한다. 이상하게도 소름이 돋고 문을 절대 열어선 안될 것 같았던 기분 나쁜 경험을 하는데 세월이 흐르고 그 일도 잊어갈 즈음 가나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결혼하고 치사라는 딸아이를 낳아 행복한 일상을 살아간다. 육아에 적극적이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히데키는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기묘한 사건들이 반복되면서 어린 시절 자신을 찾아왔던 '보기왕'이라는 괴물을 떠올리게 되고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소문 끝에 오컬트 작가 노자키 곤과 마코토라는 영매사를 만나게 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히데키의 노력이 절절한 만큼 그에게 다가오는 공포는 점점 공포의 수위를 더해간다. 히데키는 보기왕으로부터 자신의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아내와 딸이 무사한 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당분간 아내와 딸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와 대화를 하고 싶고,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딸과 아침부터 밤까지 놀고 싶었다. /p137~138
"괴물이나 혼령은 대부분 빈틈으로 들어오죠."
"빈틈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단어를 고르고 있는 것이다.
"가족 간에 생기는 마음의 빈틈이에요. '골'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마음에 골이 있으면 그런 걸 부르게 되거든요." /p202~203
선망이다. 결국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뿐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아이가 있고, 휴일에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견딜 수 없는 것뿐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내 안에 있는 손톱만 한 자의식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것뿐일까?
아이를 가진 부모는 모두 올바를까?
아이를 가진 부모는 모두 좋은 사람일까?
아이를 학대해서 죽게 만드는 부모, 밥을 주지 않아서 굶어 죽게 만드는 부모, 젖먹이에게 각성제 주사를 놓는 부모. 극단적인 최악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방임주의라는 이름으로 육아를 포기해서 아이를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하는 부모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p239
방문자 / 소유자 / 제삼자 가나의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두 번째장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히데키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고 육아 커뮤니티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가족이 행복하기 위해 공동육아도 하는 가정적인 남편이었는데, 가나에게 히데키는 부담스러운 가장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사 모으기 시작한 부적들, 육아 활동을 빙자한 외부 활동으로 점점 늦어지는 귀가. 가장으로 살아가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이해하려고 해도 가끔은 가나도 힘들다. 치사와 자신을 위해서라는 히데키의 말과 행동에 점점 지쳐간다. 그런데 그들의 가정에 알 수 없는 공포가 몰아닥치고 히데키가 죽고 말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후련해서 목청껏 기쁨의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남편이 이 집에서 없어졌다! 이제 그의 육아 방식에 따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p156
"이 건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그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나는 불안에 휩싸인 채,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서 물었다. 마취는 이미 풀렸지만 아직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이 세상의 모든 병도 그렇고 상처도 그렇고, 완치되려면 시간이 필요하죠.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저에겐 20년 된 고객도 있어요." /p373
요즘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을 때면,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간다!' 라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정확히 망태할아버지가 뭔지는 몰랐지만 잡혀간다는 그 자체가 공포였던 걸로 기억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홍콩할매 괴담' 이 유행했었고, 그 정도가 심해서 뉴스에도 기사화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찾아보니 그 시대 정규방송 뉴스에도 등장)
홍콩 할미 귀신 괴담이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까지 초등학생 사이에 널리 유행했던 괴담이다. 괴담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정규 시간대 뉴스인 MBC 뉴스데스크에 등장하기도 했다. 각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괴소문에 동요되지 말 것을 호소하는 등, 사회적 파장이 컸던 괴담이었다. /네이버지식인
그랬다더라...라는 이야기로 부풀려진 그 시절의 공포는 정말 상상이상이었는데... 밤에 할머니들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공포에 일찍 귀가하는 붐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마음속에서 상상력과 함께 점점 커져가는 공포감, 무서워서 눈을 감고 싶지만 눈을 감을 수도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 승부!!
<보기왕이 온다>에도 괴물이 등장한다. 옛이야기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의 '보기왕'이라는 괴물이 한 가정을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점점 커져가며 다가오는 공포에 멈칫하다, 지나간 건가? 긴장을 놓으려 하면 어!!어!!! 하며 다시 죄여온다. 공포는 보기왕의 등장으로 공포의 정점을 찍는다.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먹는 입을 줄여야 남은 이들이라도 살아갈 수 있었던 시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휘둘렀던 횡포와 그걸 견디며 살아온 식구들의 내면을 비집고 흘러나온 미움, 집념, 뒤틀린 인간 심리가 만들어낸 괴물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뒤틀린 인간의 심리가 만들어낸 괴물. <보기왕이 온다> 도 그런 맥락에서 시작한 글이 아니었을까? 치밀한 구성과 뛰어난 표현력, 가독성 있는 글은 궁금해 손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일본판 망태할아버지? 일본 특유의 가족에 대한 정서와 호러물 공포의 조합은 때론 코끝을 시큰하게 하기도 한다. 책장을 덮기 전 히데키의 할머니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보게 된다. "계속 참기만 하면 마음속에서 나쁜 게 쌓이는 법이지.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대가가 온단다. 계속 참는 게 좋은 일은 아니야. 나는 참았어, 그러니까 용서해줄 거야.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세상은....이 세상은." /p31 상상력을 마음껏 동원해 읽으면 더더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극한의 공포를 경험하고 싶으신 분은 늦은 밤에!! 나처럼 쫄보인 분들은 환한!! 낮에 읽으시길 추천한다.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대답하면 안 된다.
문을 열어줘도 안 된다.
절대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