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미시마 유키오, 사노 요코등 최고의 작가들이 사랑한 '소확행'정신의 선구자인 모리 마리의 국내 첫 산문집 <홍차와 장미의 나날> 을 읽게 되었다.  당대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슈퍼 엘리트인 아버지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였고, 어머니 시게는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마리의 작가 활동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사실 나는 어느 정도는 미치광이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반드시 내가 생각한 대로의 요리를 내가 생각한 대로 해서 먹지 않으면 아무래도 싫다는 것인데, 그 싫은 정도가 좀 병적일 정도로 심하다.  회를 간장에 담그는 정도에 대해서도, 무 간 것이나 여뀌를 뿌리는 정도에 대해서도 까다롭다.  무 간 것은 새빨개져서는 안 된다....(중략)....여기에 쓰인 대로 만들어봤을 때 내가 자랑한 것처럼 근사할지는 보장할 수 없다. 오랜 세월 주부였던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자고로 요리의 맛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며, 큰 숟가락으로 몇 숟가락, 몇 그램이라는 식으로 정해버리면 오히려 재미없다. 두세 번 만들어보면 잘 되리라 생각한다. 요리의 맛은 봄이나 여름등 계절의 변화, 그날그날의 날씨 상태, 신선하거나 덥거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또 먹는 사람의 기분에도 변화가 있으므로 숟가락으로 몇 숟가락, 몇 개, 몇 그램이라는 식으로 융통성 없이 만들 수 없는 법이다. /p63~069 요리비망록 

일하는 틈틈이 직접 뭔가를 만들어 먹거나, 혼자서 혹은 친한 친구들을 불러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가서는 왁자지껄 떠들며 먹고, 또 먹으면서 떠드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성(이 말이 붙으면 왠지 콜레라는 티푸스가 연상되지만) 식도락가라 불러야 마땅하다. 

  그런 의미로는 나 역시 훌륭한 식도락가다.  넘치게 훌륭해서 훌륭함이 거스름돈을 내줄 정도다.  젊은 사람이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누가 노인이라 부를 때 아니라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먹는 걸 좋아하기로는 여전히 아이 못지않다.  그런데 나는 아주 마음에 드는 요릿집에서도 내가 만든 요리가 더 맛있다고 느낀다.  단, 내가 가는 요릿집을 변호하자면 그 가게에서는 내 지갑 사정에 걸맞은 가격으로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버터를 넉넉히 집어넣을 수도 없고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안심이나 등심 같은 식재료를 쓸 수도 없다. /p188  침대 위에서 요리하기

 

  마리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도 없는 독자들을 위해 옮긴이의 서문에서 마리의 일생을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부유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결혼 이후의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1903년 태어나 딸 사랑이 유명한 오가이의 딸로 자라면서 열여섯까지 무릎에 앉혔을 정도라고 하니 대단한 딸 사랑이 아닌가? 1921년 다마키와 결혼해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1923년 프랑스에서 귀국하는 동안 2명의 자녀를 낳고 살았지만 1927년 다마키와 이혼을 하면서 편지만 남겨두고 아이들은 두고 나온다.  훗날 "내게 인생이 두 개 있다면 하나는 집에 머물며 아이들과 지내기 위해 썼을 것이다.  하지만 일생은 하나뿐이다.  하나밖에 없는 삶을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건 싫다." 라고 고백했다. /p6  모성에 대한 관념이 지금보다 더 강요되었던 시대였을 텐데, 자신의 삶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마리, 훗날 재혼을 하지만 다시 이혼을 하게 되고 아버지 오가이의 저작권 수입도 끊기면서 어쩔 수 없이 직접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이혼으로 멀어졌던 자식들과도 재회하게 되는데 장남 자쿠와는 연인처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나는 어지간히 나이를 먹었다.  여태껏 마음이 어른스러워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제 죽을 때까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별로 쓰고 싶지 않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기보다 언제까지나 나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인 곤란한 인간인 것 같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했듯 선종의 법력 높은 스님을 찾아간다 해도 안 될 것 같다. 만사에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어리석고 평범한 인간이다.  쓸 수 있는 약은 없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나 자신만 생각할 테지.  부모님께 사랑받기만 하고 보답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고작 네 살짜리 어린애나 마찬가지다.  /p229~230 파파에 대하여


결혼하기 전까지 음식이라곤 만들어보지 않았고, 결혼해서도 주방에 마리가 발을 디딜 틈은 없었지만 부유한 어린 시절을 지내오면서 음식에 대한 미각은 열렸던 것 같다.  음식과 관련한 이야기와 추억, 그리고 이후 혼자 살게 되면서도 음식을 탐닉하고 즐기는 마리의 생을 지탱하게 해주고 반짝이게 해주는 건 아니었을까?  마리의 인생 전반을 본다면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집가기 전까지의 생할까지가 인생의 피크였을 것이다.  이후에 두 번의 이혼을 하고 먹고살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마리의 글을 읽을 수 있었을까?  마리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고 읽었다면, 요리들을 알고 읽었더라면, 조금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았지만.... 철이 없어 보일지언정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았던 마리의 글은 자신의 행복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주는듯했다. 



 보티첼리의 장미 찻잔은 연홍색 꽃잎에 푸른빛이 감도는 연두색 잎사귀가 달린 장미가 흩뿌려진 홍차 찻잔인데, 그 꽃이 옛날 이탈리아 미술관에서 본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하늘과 바다 위로 흩날리는 장미를 빼닮은 데다 잎사귀 색 역시 그 그림의 하늘이나 바다색처럼 푸르스름해서 그렇게 이름 붙인 찻잔이다.  침대 곁에 그 찻잔과 두꺼운 유리로 된 밀크 용기, 네슬레의 무당연유 캔, 은(진짜 은이다)으로 된 숟가락이 놓여 있는데, 소설을 쓰는 것이나 써지지 않는다는 괴로움에 지치면 물을 끓여서 립턴 티백으로 홍차를 만든다.  프리먼 크로포츠 같은 영국인의 추리소설을 읽다가 차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또 마시고 싶어져서 물을 끓인다.  차를 마시는 내 눈에 침대 헤드보드 위 빈 베르무트 병에 꽂아둔 빨간 장미, 파르스름한 코카콜라병, 짙은 파랑색 병에 꽂아둔 진홍색 장미와 하얀 꽃, 연홍색 꽃 등이 비쳐서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배로 늘려준다.  영화 제목을 빌리면, <술과 장미의 나날>이 아니라 '홍차와 장미의 나날'인 셈이다.  /p266~267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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