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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평점 :

나는 아로니아 공화국 대통령 김강현이다.
"나는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최선을 다하여 헌법을 준수하고 보호하며 보존할 것을 블루토피아 아래에서 엄숙히 선서합니다."
2028년 7월 7일, 쏟아질 듯 눈부시게 빛나는 멋진 날이었다. 나는 파랗고 하얗게 빛나는 '블루토피아'깃발을 왼손으로 꼭 움켜쥐고 아로니아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을 향하여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채 굳은 맹세를 했다.
빌어먹을! /p11
해가 바뀔수록 사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만족을 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행복하지 않은 걸까?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은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나라를 만들어가는 신명 나는 이야기이다. 2028년 아로니아 공화국의 대통령 김강현의 선서로 시작하는 글은 그의 어린 시절과 아로니아 공화국을 오가며 진행된다. 친구들과 만화방에서 놀던 시절, 동구 만화방 텔레비전이 박살 나서 돈을 모아 텔레비전을 구입해주자고 의견을 모았지만, 결론은 강현이 친구들의 돈을 갈취해서 모금의 대부분을 채웠는데, 아버지인 동국건설 김기천 씨에게 그 현장을 들켜 그동안 돈을 갈취했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사과하고 돈을 다 물어주게 된다. 시간이 흘러 만약 그때 아버지에게 그 현장을 들켰던 건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다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혀서 죽는 날까지 무르거나 되돌릴 수 없는 맹세는 결코 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다고 무조건 해서는 결단코 안 된다. 멍청하게도 그날 나는 맹세의 엄중한 의미를 정말로 몰랐다. /p74
김대중 정권은 어이없게도 그들의 더러운 코를 대신 풀어준 셈이었다. 기업은 망해도 재벌기업 회장들과 자식새끼들과 일가붙이 나부랭이들은 망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갈 곳을 잃고 길거리를 헤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재벌기업 회장들과 자식새끼들과 일가붙이 나부랭이들은 갈 곳을 잃거나 헤매지도 않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았다. 사재를 털어서 기업을 살리고 노동자들과 함께 기업 구조를 개선하여 공적자금이 들어간 자신의 기업을 국가에 헌납하는 아름다운 기업인들을 바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늉이라도 바라며 일말의 양심을 기대했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는 자의 착각이었을까? 착각은 무슨, 어리석은 민중이지. 자본은 양심이 없다. 결코 자본은 아량과 관용과 선의라는 단어들과 양립할 수 없다. /p92
익숙한 것은 사람을 무심하게 만든다. 무심한 것은 사람을 외면하게 만든다. 외면하는 사이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 지나온 동안 수영과 나는 누나였고 아내였고 또한 남편이었다. 지민이 태어났고 어머니가 자리를 지켰고 우리는 언제나 가족이었다. 사람들은 가족을 영원할 것처럼 말한다. 틀렸다. 부모 자식은 비가역적일지 몰라도 부부는 떨어지면 깨지는 그릇이다. 언제든지 되돌릴 수 있는 가역적인 관계. 부부는 믿음이라는 약속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신뢰해야만 유지되는 잠정적인 관계일 뿐이다. /p143
아버지에게 끌려다니게 된 무림합기도에서 만난 첫사랑 수영. 그녀를 위해서 성당을 다니고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강현은 그녀와 같은 대학을 다니기 위해 열심히 외운다. 그저 외워서 법대를 나와 검사가 되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굵직한 사건들은 '아로니아 공화국'이라는 국가의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이야기한다. 검사로 살아가며 부와 권력 때문에 스러져간 국민들의 삶을 보면서 미련 없이 검사직을 내려놓는다. 참 어이없는 시대를 살아온 우리가 아닌가...
나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로니아는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 시민은 늘 항상 언제나 국가권력보다 무겁고 소중하며 우선돼야 한다. 오로지 이것만이 아로니아가 존재하는 이유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허투루 여기는 국가는 국가로서 자격이 없다.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나 몰라라 하는 국가는 국가로서 존재 이유가 없다. 자격이 없고 존재 이유가 없는 국가는 반드시 사라져야 마땅하다. 잘라서 말한다. 아로니아 시민은 곧 아로니아 국가 그 자체다. /p151~152
"세상에 태어난 일은 행복한 일이지만,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좋든 싫든 꼼짝없이 한 국가의 국민이 된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죠. 저는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쓰레기들이 장악한 국가의 국민으로 길들여진 채 평생 의무를 지고 권리를 찾아다니며 허둥지둥 살아야 한다면 슬프고 불행한 일 아닌가요? 저는 제가 선택한 재밌고 신나는 국가 아로니아를 만들 겁니다. 제가 살고 제 자식들이 살고 또 그 자식들이 살아갈 재밌고 신나는 국가를 직접 만드는 일은 정말로 멋지지 않나요? 이렇게 멋진 일을 하지 않는 건 제 자신에게 죄를 짓는 거죠." /p261
검사직을 내려놓고 집에서 쉬던 중 송성철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큰놈 하나 작은 놈 하나' 서류를 주고 간다. 신나게 놀겠다던 어른들이 바다 한가운데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다. 이야기글 듣다 보니 묘하게 설득되고 '큰놈 하나 작은 놈 하나' 프로젝트에 동참하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과연 국민들이 평등하게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천문학 적인 돈이 들어가고 나라 간의 외교 문제도 걸려있다. 한. 중. 일 간의 미묘한 외교 문제를 아내인 수영과 딸 지민으로 인해 돌파구를 찾게 되고...
"넌 아로니아를 만들겠다는 나에게 가타부타 말을 안 했어. 그리고 에크로피아에 들어왔고 하호하오츠바를 했고 아로니아를 만들었지.... 왜 허무맹랑했을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했어?"
수영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도 일어나 수영의 어깨를 감쌌다.
"너니까... 네가 하겠다고 하니까... 너잖아. 뭐가 더 필요한가?" /p411
처음엔 모 작가의 글과 비슷한 분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갸웃 했는데 읽다보니 김대현 작가의 글에 빠져들게 된다. 무조건 행복하고 재미있게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김강현과 그의 사람들, 하지만 마지막 즈음 아내인 수영은 아로니아 공화국을 없애겠다고 한다. 행복을 강요받는 사람들이 과연 진정 행복하겠는가?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이 힘들고, 싫어서 떠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간히 듣게 된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을 해외에 내보내 그곳에서 자리잡기를 유도하는 부모들도 있다. 사실 가끔 생각한다. 이 나라가 참 살기 힘든 나라가 아닌가 하고, 조카들이 살아갈 10년후, 20년 후는 지금보다 나아졌으면 하는 생각도 더불어... 국가를 바꿀 수 없어서 국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도발적이지만 경쾌하다.
언제나 살았고 어디서나 살았던 사람은 국가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산다. 세상의 사람은 영원하고, 사람이 만든 국가는 영원하지 않았다. 지나온 세상의 역사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원하지도 않은 국가를 영원하다고 믿는 것은 헛되고 터무니없는 아집이다. 사람과 사람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추잡하고 초라하고 조잡스러우며 너절하고 파렴치하고 무능력한 국가가 왜 필요한가? /p412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