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함부로 설레는 마음
이정현 지음, 살구 그림 / 시드앤피드 / 2018년 7월
평점 :

사계절 에세이를 즐기지만, 계절 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선택해서 읽는 책들도 계절에 맞춰 출간되는 기분이 들어 신간을 기꺼운 마음으로 읽는 편이다. 처음 만나는 작가일 경우 대부분 제목이나 책표지를 보고 반하게 되어 들여다보고 읽고 싶어져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함부로 설레는 마음> 은 이정현 작가의 두 번째 책이라고 한다. 책표지의 그림도 살구님의 일러스트로 감성이 뿜뿜 넘치는 책이라 생각됐는데 이름만 보고 여자 작가의 글인 줄 알았는데 남자 작가!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어떤 계절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금'이라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계절이 되는 게 아닐까요.
우리의 지금이어서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p011
산다는 건 때로는 아무렇게나 쓰인 잡문같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래서 좋은 걸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대로 쓰이는 글처럼, 머리가 쓰는 건지 손이 쓰는 건지도 모르는 그런 글처럼, 꾸밈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거니까.....(중략).... 산다는 건 그렇게 쓰인 잡문이어서 아름다운 걸지도 모르겠다. /p048
빨라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걸까. 여유가 있는 사람이 빠를 수 있는 걸까. 둘 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허겁지겁 살아가는 우리도 나중의 여유를 위해서 이러는 걸까. 나중이라는 단어가 얄궂다. 삶에 나중이라는 계절이 있을까. /p059
계절에 설레다 / 추억에 설레다 / 사랑에 설레다 / 사람에 설레다 이렇게 구성된 글은 살아가며 깊이 있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글은, 스쳐가는 우리의 삶을 타인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나'를 들여다보게 한다. 설레임, 애틋함, 무심코, 함부로 이러한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지만, 조화를 이뤘을 때의 파급력은 단어 하나, 이상의 효과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이정현 작가의 글을 읽으며 때론 지나간 사랑이, 시간이 애틋했고 현재의 시간을 다시금 생각해보기도 했다.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나'자신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곤 있었지만 막상 최근 읽은 책들을 통해 다시 확인하다 보니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 나의 상태가 어떤지 인지했으니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라며 자기 위안을 하기도 했던 글이었다.
아홉은 어떤 의미일까. 실은 그 다음에 오는 숫자나 크게 다름이 없는데도 자릿수를 꽉 채우지 않고 머무른다. "이렇게 좋은 구성이 십만 구천구백 원"!" 어렸을 적 친구들과 티브이에 나오던 홈쇼핑 광고를 따라 하며 장난을 치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홉, 뻔뻔한 숫자 같지만 또 그걸 보는 사람은 속내를 알면서도 굳이 따져 묻지 않는 숫자. 익숙해져 밉지 않은 숫자.
사람이 가지고 살아가는 마음도 꼭 그렇다. 자주 아홉에 머물러 있곤 한다. 가득 찬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모두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하며 지나가기도 한다. 채우고 싶지만, 그랬던 적도 있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 마음이랄까.
누구나 아홉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만 비워두고서,
하나를 채우지 못해서.
누군가 그 하나만 채워주기를 바라면서.
가끔은 누군가의 하나가 되기도 하면서. 그렇게들 살아간다. /p175~176
설렌다. 그러다가 애틋해진다. 짧게 보는 것일수록 애틋하다. 첫눈이 설레는 건 눈에서 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계절의 기억 때문일까. 언젠가 봤던 클리셰투성이의 연속극 때문일까. 오늘 같은 날은 손을 잡고 있고 싶다. 녹아내리는 눈보다 중요한 사실은 첫눈이 없는 해는 없다는 거라고, 그러니 애틋한 것에도 이렇게 함부로 설렐 수가 있다고.
(중략)
나는 자주 너에게 함부로 설렌다. 분명 우리가 애틋해지는 날도 진부한 클리셰처럼 찾아오겠지만, 지금은 서로에게 소복하게 쌓이고 싶다. 나는 당신에게 첫눈이 될 테니. 당신은 함부로 설레어도 괜찮다. /p208~209
소설, 고전, 인문 분야보다 에세이를 선호하는 이유는 타인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슷한 글은 있어도 같은 글은 하나도 없듯이 그들이 이야기하는 삶이 자신의 경험과 시간을 토대로 쓰인 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의 인생이 아닐까?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고, 그만큼의 경험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글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선보이기도 하면서 오늘도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글을 쓰고 있을 이정현 작가의 다음 글이 기대된다.
산책길에 꽃을 닮은 마음씨를 만나듯, 나의 글과 생각도 지나가는 누군가의 삶을 무심코 행복하게 만들기를.
잠깐이라도 미소가 번지게 하기를. /p283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