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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파이 나누는 시간
김재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8년 5월
평점 :

"마땅히 사과받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한 노래"
처음 읽어보게 된 김재영 작가의 <사과파이 나누는 시간>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잔잔한 그들의 일상, 미세한 균열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본과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의 삶은 보다 확장된 '이주민'의 삶을 다루고 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타향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는 이주민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 광고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기획한 거였다. '사과쟁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작가는 (어느 냉소적인 인물의 입을 통해) 사과쟁이란 착각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사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일 뿐, 자기 잘못이라고 밝힌 다는 건 상대방이 당신에게 욕을 퍼붓고 당신을 죽을 때까지 만천하에 당신을 고발하라고 부추기는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그게 바로 사과하는 행위의 치명적인 결과라고 했다. 하지만 사과쟁이 캐릭터를 가진 인물(실제로는 작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는데)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 /p18 <사과파이 나누는 시간> *밀란쿤데라 『무의미의 축제』58쪽
무엇보다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고독한 평화가 있어서 좋았다. 이제껏 그녀가 경험한 대로라면, 인간이란 서로 다른 복잡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이어서 일부러 맞추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더 다투게 되거나 사소한 오해 끝에 깊은 상처를 주고받기 쉬웠다. 원룸 보증금을 다 날려버리는 비싼 여행 끝에 그녀가 얻은 것은 '사랑 없는 행복'이었다. 혼자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자 일상이 계획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나 관계에 대한 집착을 덜어내면 낼수록 살기에는 편했다. 그즈음 우주를 만났고, 사랑에 빠질 위험이 극히 적은 소꿉친구와 보내는 저녁은 무균실에서 지내는 것처럼 안전했다. /p24 <사과파이 나누는 시간>
8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웃이고, 어쩌면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크게 다른 삶을 꿈꾸며 살아온 것도 아닌데 이들의 삶은 저마다의 미세한 균열로 피로하고 힘겹다. 일상을 탈출해서 다른 곳에서 자신과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이들도 이내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영혼 없는 사랑을 지지한다는 거야?"
"아니야, 그건. 다만 로맨틱한 사랑에는 가부장적 남성상과 순종적 여성상이 마취제처럼 녹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늘 정욱을 위해 살았지? 그의 취향에 맞추고, 그의 시간에 맞추고, 심지어 그를 위해 출산마저 포기해버렸지? 수진, 저 달을 봐. 합삭에서 벗어나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수진도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해."
뜨끔했다. 그녀 말이 사실이었다. 달이 태양의 반대편으로 숨어들어가 지구 그림자 속에서 사라지듯이 언제나 나란 존재를 숨기기에 바빴다. /p133 <특별한 만찬>
서른다섯에서 마흔 사이. 한겨울의 폭설 속을 헤치고 겨우 목숨만 건져서 살아 나온 것 같았다. /p186 <무지갯빛 소리>
사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으로 멍해서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던 책이기도 했다. 이 글들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몇 번은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더불어 해보기도 했고, 추려둔 문장들이 꽤 되서 다시 한번 간단히 훑어보기도 했다. 모든 삶이 반짝거릴 수 있을까? 만족하는 삶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나 반짝거리며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빛을 잃어가는 삶을 위로하는 저자의 글은 조금은 몽환적이면서도 글을 읽으며 위안을 얻게 된다. 마음에 내려앉는 문장들을 하나 둘 낚아가며 읽었던 <사과파이 나누는 시간>은 평소 먹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도 않았던 사과파이가 먹고 싶어지기도 했다. 뜬금없이... 사과를 키워내는 과정, 그리고 그 사과로 달콤한 사과파이를 만들기 위해 거쳤을 과정들을 상상하니 어쩌면 이 과정들이 우리의 삶과 닮아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살포시 해보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단편 하나씩을 다시 읽어봐야지 천천히 그들의 인생을 보듬어 봐야지.
이상하게도 아가씨들은 바다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바다는 아가씨들의 사진 속 배경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웃음소리에서 묻어나는 젊음의 생기만은 싱그러웠다. 아직 세상의 위험에 대해 잘 모르는, 철없는 희망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은 어린 존재의 내면에서 울리는 가벼운 딸랑거림! ..... (중략).....해가 지기 전까지 아가씨들은 다른 유명한 장소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를 듣는 대신 낮에 찍은 사진 중에 가장 근사한 사진을 휴대전화로 지인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나 이렇게 행복해. 부럽지? 제발 부러워해줘. 그러면 육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부러움으로 밤잠을 설치게 되고, 얼마 뒤에는 섬으로 오는 비행기 티켓을 끊게 될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사기 위해서, 타인처럼 되기 위해서. 그것이 이 섬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일까? 단지 그 이유일까? 도망쳐 숨어들거나 외따로 스며들기 좋은 섬. 때로 반란의 거점이 되곤 했던 섬. 그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아닐까. /p240 <그 섬에 들다>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