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묵배미의 사랑>이란 영화가 있다.
박영한의 동명소설이 원작이고, 박중훈, 최명길 주연의 영화로 소외계층의 불륜이 소재인데 90년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및 남우주연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뜬금없이 웬 영화얘기냐며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다름이 아니고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했을때, 제목을 '우묵배미의 여름'이라고 읽고는 '<우묵배미의 사랑>후속작쯤 되겠거니..;;'라는 생각에 당연히 불륜소설일 거라고 착각을 했었다는 우스꽝스러운 얘기를 하고 싶어 영화얘기부터 꺼냈다.

그 후, 이 책 제목을 제대로 인지를 하고 난 후에도 내 뇌는 처음 인지했던 '우묵배미'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 한동안 '우부메'가 아닌 '우무베'로 읽는 실수를 범했다. 딱히 그 영화를 감동적으로 본 것도 아닌데 단순히 쓰인 자음이 비슷하단 이유만으로 뇌에서 제 멋대로 글자를 재조합하다니..참 난감하다.;; (하도 이런일이 많아 이젠 놀랍지도 않다만;) 그리곤 잊고 지내다가 얼마전 교고쿠도 시리즈중 하나인 '망량의 상자'가 출간되면서 이 소설도 같이 이슈로 떠올라 그제서야 나는 이 소설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책은 국내에도 꽤 많은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로 2004년 3월에 출간되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소설이다. 고서점 교고쿠도(京極堂)를 운영하는 주인공 교고쿠도. 본명은 따로 있으나 지인들은 그를 서점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괴짜같은 행동에 지식은 방대하고, 지독한 애서가(愛書家)에 기억력도 남다르며 그에 걸맞게 말솜씨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수준급이다. 달변인지 궤변인지 모를 그의 이론을 듣고 있자면 어쩐지 내가 알고 있는 건 다 거짓정보이고, 심지어 허접하고 쓸데없는 것 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그는 세간의 시선과 편견탓에 그리 즐기지는 않지만 음양사(陰陽師)의 일도 겸하고 있으니 이제는 우러러보이기까지 할 정도다.

그런 교고쿠도의 주변에는 비범한 사람들이 많다. 눈이 잘 안보이는 관계로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간판만 탐정인 에노키즈, 능력좋고 혈기넘치는 형사인 기바 슈타로, 보이쉬하고 발랄한 숙녀이지만 교고쿠도의 여동생답게 가끔 번뜩이는 생각과 논리정연한 추리를 해내는 추젠지 아츠코... 그런 사람들 틈에서 전체 이야기를 서술하는 삼류작가, 세키구치 다츠미는 그저 범인(凡人)일 수 밖에 없다. 그를 보고 있자니 '어휴-답답해'하다가도 순간 안쓰러워지는 건 나도 비범(非凡)보다는 범인(凡人)에 가까운탓에 절로 느껴지는 못난 안타까움 같은 것이리라.

'우부메의 여름'은 일본적인 색채가 아주 짙은 작품이다. 더욱이 괴담과 전설, 역사, 신학, 과학에 대한 방대한 주변지식을 기초로 한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추리&미스테리 쪽이겠지만 사건을 토대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것들에는 기존 소설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치밀함과 번뜩임이 있다. 미스테리 소설의 길을 따르고 있으나 묘하게 철학적이고, 문학적이다. 아마 그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을 극대화 하고 있지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총 600페이지가 넘는 나름,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하드커버 양장본에 나무랄데 없는 번역과 독자를 배려하는 자세한 각주설명이 있어 이해하기 힘들지는 않지만, 앞에서 말했듯 일본적 색채가 짙어 일본의 역사나 민속학, 전통문학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중간중간 읽어도 읽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심지어 관심도 있고, 깊이있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기초적인 건 다 배운 나도 진도가 더뎠으니...참..할 말이 없다.)허나, 그것도 전체적인 스토리 진행상 읽고만 넘어가도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나마 '각주'이기에 망정이지 '미주'였으면 미쳤지 싶다.-_-;; 더운 여름날 앞 뒤로 이리저리 책 넘기는게 보통일인가..!)

다만 아쉬운 점은 '이 두꺼운 책에...그것도 하드커버 양장본인데... 웬만하면 '책갈피 줄' 하나 있으면 좋잖아!'하는 생각이다. 물론 아무거나 종이 책갈피를 이용해도 되겠지만 '책갈피 줄'의 편리함에 비할바가 아니지..! 게다가 난 여태껏 하드커버는 다 '책갈피 줄'이 있는 걸로 인식해왔기때문에 그게 없는 걸 알고 일말의 배신감도 느꼈더랬다. (- _-;;) 나처럼 이 책을 처음잡은 순간부터 놓을때까지 빈틈없이 쭈욱 읽을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바쁜 시간 쪼개어 틈틈히 읽을 사람은 '책갈피 구비'는 필수다.

또한가지! 이 책이 '외국어 표기법'에 충실히 입각해서 쓴 것은 알겠지만 일본어를 좀 아는 사람이나 혹은 전공자일 경우, 인명이나 지명같은 고유명사 표기가 엄청 신경쓰인다. 여기서 '외국어 표기법'의 실용성을 따지자는 건 아니지만 '쿄고쿠도' '키바 슈타로' '쿄코'라는 발음에 더 익숙하기에 현행 표기법 상 '교고쿠도' '기바 슈타로' '교코'라고 하니 일본어 좀 아는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영~ 찜찜하다. (영어 표기법상 'tsunami'이고 듣기에도 '츠나미' 혹은 '쯔나미'가 맞다고 생각했는데 표기법상 어두에 오는 된 소리는 무조건 예사소리로 바뀌고, 'tsu'의 경우 '쓰'로 발음한다 하니...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고..답답해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많이 무뎌졌지만...;; '하루빨리 이 '외국어 표기법'을 개정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은 굴뚝같다. (특히 '키무라 타쿠야'를 '무라 쿠야'라 표기한 것을 보면 아우~ 그 답답함이란...;; 끄어-)

어쨌든, 그런것이야 무시하고 편한대로 읽으면 그만이니 이 여름,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고 무료함에 지친다면 이 책으로 더위를 식혀보는것도 괜찮은 방법인 듯 싶다. 읽는 내내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덧) '우부메'란 사전상 원래 의미는 '산녀産女'라 하여 '임신을 한 여자'라는 뜻이지만 책에서는 '고획조姑獲鳥'라 하여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자 혹은 그 여자의 집념이 이것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고획조와 우부메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으니 마지막에 헷갈리지 않으려면 잘 인지하고 봐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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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2007-04-1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책 구입했는데..역시 5판인쇄라 그런지 책갈피줄은 있더라구요ㅎㅎ 평소 일본에 관심이 쬐끔있었던지라 옛날역사나 요괴,전통문화에 대한 부분도 알아가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것같아서 내심 설레였었는데..초반의 지루함을 잘 이겨내야한다는 다른분의 리뷰-_-;;..그리고 다소님의 리뷰를 읽고있자니..어쩐지 제겐 벅찬 책이 될것같기도 하네요...(요 책 머리나쁘면 잘 이해못하나요?제가 머리가 좋지않은지라 이해력이 좀..ㅋㅋ) 두번째 시리즈인 망량의 상자도 같이 샀는데요......사실 망량의 상자는 겉표지 그림이 괴기스러워서-_-;;별로 맘에 들지않았는데(책 내용이 중요하지 표지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만 보통 잠자리에서 책을 읽기때문에 표지가 그리 괴기스러우면 십중팔구 악몽을 꿀것같은 불길한 예감에 ㅎㅎ)그래도 읽고싶단 생각에 사긴했어요 물론 책 받자마자 겉표지는 얼른 떼어버려서 썰렁한 하드커버만 남았지만요 ^^ 아무튼 오늘부터 열심히 읽어봐야겠네요 읽고 감상평 남길께요 ㅎㅎ

다소 2007-04-14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홀 님 / 오오, 쇄를 거듭하면서 가름줄을 넣었나보군요. 좋은 현상. :)
이 소설은 너무 기대를 갖고 보면 기대에 못 미칠 확률이 높아요. 실제로 그런 분들 꽤 많이 봤구요. 근데 다행히 블랙홀님은 역사나 요괴, 전통문화 같은 것에 관심이 많다니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거에요. 책이 어렵거나 하지는 않아요. 다만 본문에도 썼듯이 초반의 장광설이 좀 지루하게 느껴질 수가 있어서 그걸 넘지 못하면 읽다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아, 그리고 결말에 대해서도 쉽게 납득하지 못하실 수도 있어요. 명확하고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것을 좋아한다면 이 소설의 결말에 불만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전 새로운 장르를 접해서 상당히 기분좋게 읽었는데...^^ 일단 한번 읽어보셔요.

블랙홀 2007-04-17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토요일날 드디어 다 읽고말았습니다..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상당히 좋았어요 제스타일이기도 했구요ㅋㅋ 사실 제가 추리소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막 즐겨보는 편은 아니라 반전이나 트릭같은것에는 별로 연연하지 않거든요..전 그래서 오히려 이런류의 추리소설이 제 입맛에 맞는듯해요...스릴러스럽기도 하구요 ㅎ특히나 전 반전이 더 마음에 드네요...분명 그곳에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저도 그런적이 있었거든요 분명 다른사람은 다 보이는데 유독 저만 못봤던-_-;;물론 심리적인 이유였겠지만요..그래서 더 공감이가요...특히나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모든 실마리가 풀릴때는 전율까지 느껴지더군요..아..그랬구나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그러고보면 앞에 교고쿠도의 장광설을 지루하다고 뛰어넘지 않고 읽어두길 잘한것도 같아요 물론 완벽하게 이해는못했지만 그 이야기들이 결국 뒷부분과 교묘하게 연결되어있다는걸 느꼈거든요..그리고 부분 부분 깔린 복선들도 결국엔 마지막에 다 연결이 되더군요..그러고보면 이 작가..상당히 치밀하네요..너무 치밀해서 소름이 끼쳐요...왜 이런 소설을 지금에야 알았을까요 진작 볼껄 후회가 되네요..ㅎㅎ 여하튼 마지막 반전을 빼더라도...구성이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힘이 대단한 소설임에는 틀림없네요..^^ 지금은 망량의 상자를 읽고있어요 망량의 상자는 우부메보다 작품성이 더 뛰어나다고 하니 또 열심히 읽어봐야겠습니당~^^

다소 2007-04-18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홀 님 /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에요. 가끔 이런 일이 있어요. 저는 재밌었는데, 남들은 '그게 뭐야!'하는 반응을 보일 때.. 그럴때면 좀 민망했는데, 다행히 블랙홀님은 저랑 취향이 비슷한지 반응도 비슷하네요.^^ 우부메의 여름을 읽고 있다보면 교고쿠도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리고 그 고서점에도 가보고 싶고.>_< 하여간 즐거웠던 책임에는 분명하지요. <망량의 상자>도 재미있게 읽으시길 바래요.^^
 
불가사의한 소년 3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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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의 진실 혹은 단면, 인간의 욕망과 그 끝이란 어떤 것일까?
쉽게 결론을 낼 수 없는 주제이고, 이렇다 할 결론을 내려봤자 납득하기도 어렵다. 처해진 상황, 현재 심리상태, 얽히고 섥?인간관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것이 그런 철학적인 문제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그딴 거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프지...'라며 그 문제를 마냥 덮어둬버리면 인생이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굳이 무겁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한번쯤 이런 철학적인 문제로 머리를 굴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고작 '만화책 감상' 하나 쓰면서 서두가 너무 장황하다고 하려나?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이 만화책은 그런 장황한 주제로 인간의 내면을 자극하는 만화니까...
신비한 힘을 가진 소년이 있다. 죽지도, 늙지도 않는 이 소년은 시공간을 초월해 세계 곳곳에 나타나 여러 인간상들과 마주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의 속내를 자극하며 그들의 행동을 지켜본다. 인간들은 소년의 예상대로 행하기도 하지만 의외의 방식과 행동으로 소년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그런것이다. 인간이란... 예측할 수가 없어 더욱 흥미진진하다고나 할까?

욕망에 가득차 형제를 죽이는 남자,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친구를 속이고 자신마저 옮아매는 여자, 복수를 위해 평생을 몸바치는 남자, 자유를 갈망하지만 결국엔 속박에서 행복을 얻는 여자... 이런 인간들을 바라보며 잔혹할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인간이란 재밌어'라며 쿡쿡 웃어대는 소년의 모습은 가히 '악마'라고 불러도 될 정도. 허나.. 그것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그 뒷면에 천사처럼 여린 얼굴로 인간들을 바라보는 표정도 있으니 뭐가뭔지 도통 모르겠다. 결국 관점의 문제인가?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질릴만 하면 물갈이 하듯 새로운 내용을 볼 수 있으니 좋다. 각 스토리마다 생각할 거리가 풍부하다.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만화다. 특히 '천재유교수의 생활'이나 '걸 프렌즈'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봐두어야 할 것이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니 실망할 염려없이 빠져들 수 있을 테니까...

덧) 원래는 별 반개를 더 주고 싶은데 만족도에는 '반개'짜리가 없어서..그냥 한개를 빼 버렸다. 왜 5개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진행중인 만화이므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라고 답할 수 있겠다. (허나...지금까지의 내용으로만 봐도 '충분히 소장가치가 있는 만화'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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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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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장소가 하나쯤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슬프거나, 힘들거나 혹은 외로울 때, 그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때가 있기에 그런 장소를 하나쯤 가져두는 건 어쩐지 든든하다. 물론 기쁘거나 기분이 좋을때에도 그 장소에 있을 수 있지만...대개 그럴경우엔 여러사람과 같이 있을 때가 많으니 좋아하는 장소가 웬만큼 넓지 않는 한 수용(收容)의 문제도 있고 해서, 그런 장소는 조금 마이너스적인 기분일때 주로 애용하게 된다.

나에게도 특별히 좋아하는 장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책상 밑'이었다. 아주 어릴때 부모님이 사주신 나무로 된 책상밑에는 주로 만화책을 진열해놨었는데 그 좁은 곳에 기어 들어가서는 동그랗게 쭈그리고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만화책만 읽어대곤 했었다. 조금 커서는 책상이 바뀌고 더 넓어졌는데, 그땐 만화책을 보기보단, 슬프거나 힘든 일이 있을때 그 밑에 쭈그리고 앉아 한 밤중이 되도록 멍하니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 때론 펑펑 울기도 했었다. 지금은 책상밑에 컴퓨터 본체랑 프린터기가 차지하고 앉아 기어들어갈 데도 없다지만 그 당시엔 그 장소를 어찌나 좋아했는지 잘때도 그 밑에 머리를 집어넣고 자서 엄마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 _-;

나와 장소는 다르지만, 부엌을 좋아하는 한 여자가 있다. 어디에 있던, 어떤 모양이던 부엌이라면 그저 좋단다. 그런 여자가 부모님을 잃었다. 자신을 길러주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중엔 할머니 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부엌에서만 잠을 잔다. 아마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에서나마 위로를 받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할머니의 지인이고, 자신과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다나베씨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이 좋아하던 그 집의 부엌과 안녕을 한다. 그리고 다나베씨의 집에서 다나베의 엄마이자 아버지이기도 한 에리코씨와 함께 3명이 같이 살게 된다. 익숙하지 않던 그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고, 예전과는 또 다른 행복을 느낀다. 새로운 부엌에 선 그녀는 작은 희망과 함께 새로운 꿈을 키워간다.(키친)

이 밖에도, 책에는 '만월', '달빛 그림자'라는 소제목으로 두편의 단편이 더 실려있다. 그 중 '만월'은 '키친2'라고 해서 처음 이야기인 '키친'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3개의 단편은 공통적으로 '죽음'을 주제로 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후 '남겨진 사람들이 성장하는 과정 혹은 극복해가는 과정'이랄까? 다소 무겁고 우울한 주제지만 침울하거나 밑바닥으로 꺼지는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상처 치유를 통해 조금 행복해진 그들을 보면 흐뭇함을 느낄 수 있다.

인간 내면의 고독감이 느껴지는 책이지만 결코 그게 싫지 않은 느낌이다. 아마도 그것이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사람의 작가로서의 능력이겠지! 첫 데뷔작인 만큼 가장 바나나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그래서 더 좋아한다. 사랑스러운 책이다.

덧) 원서로 먼저 읽었는데 번역본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모국어로 되어 있으니 빨리 읽을 수 있어 좋다. 우리말로 잘 다듬어진 작품을 2시간이면 툭탁- 해 치울수 있으니 그것이 번역본의 묘미 아니겠는가? (물론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었을 경우에 그 만족을 최대화 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면 만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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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사냥꾼 - 이적의 몽상적 이야기
이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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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페이지만 넘겨봐도 알 수 있다. '상상력에 날개를 달았다'는 말이 퍼뜩 떠오를 만큼, 이 책이 엉뚱하고도 놀라운 이야기들로 묶여져 있다는 것을. . .

두 달전쯤 가수 '이적'이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컴퓨터를 켜면 어김없이 가보는 인터넷서점의 메인에는 그의 책 출간을 알리는 소개글과 이벤트가 즐비했다. '이적'이란 사람이 얼마나 입담좋고, 아티스트의 기질이 충만한지는 굳이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었던지라 '기회가 되면 꼭 그의 책을 읽어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얼마전 소문의 그 책을 직접 눈으로 볼 기회가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하드커버 양장본에다 고급 수입종이, 꽤 눈길 끌만한 삽화가 곳곳에 배치되어있었다. 내용은 어떤가 싶어 보니 활자폰트가 큼지막한 것이 읽기에 지루하진 않겠다. 대신 그에 걸맞게 책값은 5자리수다.- _-; (허나, 요즘은 워낙에 책값이 비싸다보니 그다지 충격도 없다!)

프롤로그Prologue랄까? 목차가 소개되기전에 나오는 첫 이야기, '활자를 먹는 그림책'은 이 책이 어떠한 책인지..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것인지, 어떤 자세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느끼게 해준다. 만약 그 첫 이야기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마 뒷이야기들 역시 재미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아주 마음에 들었으므로, 뒷장을 넘기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곤 단숨에 책을 읽어내려갔다.

책은 12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것은 아주 짧고, 어떤것은 책의 4분의 1은 차지할 만큼 긴 이야기이기도 했다.(그래봤자 총 200페이지 남짓한 책이고, 폰트가 커서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12가지 이야기는 각 내용마다 독특했고, 발군의 상상력이 넘쳐나고 있다. 특히 '제불찰 씨 이야기'는 보는 순간순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마지막이 조금 안타깝기는 했지만 말이다...; 또 '자백'이란 글이 묘하게 기억에 남는다.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응징하는 그에게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까? - _-;; 특히 그가 말하는 다음 계획에 은근히 환호하는 나..;;; 하지만 진짜로 그런일이 발생하길 원치는 않는다. 현실에서 정말로 그런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엽기적인 일인가..;; 그저 상상속에서만 즐거워 하련다.-_-; (아- 내속에도 '작은 악마'가 살고 있나?)

'몽상적夢想笛 이야기'라고 책 앞에 카피로 써놓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확실히 이적의 몽상가 기질을 보여주데에 걸맞는 책이다.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환상문학'정도? 물론,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다. 상상력이 기발하다해도 그것을 글로 보여주는데에는 탁월한 능력과 기교, 수정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전문작가들이 있는 것이고, 그들이 대작을 탄생시킬때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공들여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탈고를 거친뒤 세상에 내놓는 것 아니겠는가? 이적의 상상력이 아무리 발군이라하나, 전문적으로 글 쓰는 사람의 '그것'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와 조금 미흡한 글 전개는 나로하여금 2%부족한 아쉬움을 가지게 한다. 다만 아직은 아마추어이고 처녀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놀라운 글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플러스 점수를 주고 싶다. 다음번 작품에서는 훨씬 안정되고, 다듬어진 그의 글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그가 '소설'말고 '에세이'를 써도 괜찮을 듯 싶으니 그쪽도 내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덧) 1. 얼핏, '김영하식의 글'을 닮아있어 반가우면서도 묘한 느낌.(예를 들어 '음혈인간(飮血人間)으로부터의 이메일'같은 것) 아니나 다를까...? 뒤에 김영하의 평이 실려있어 조금 놀랬다.-ㅁ-;

2.. 음악적으로도 재능이 뛰어나 그 것을 다 분출을 못시켜 어찌할바를 모르는 이 청년에게 이런 글 쓰는 재주도 있다니...- _-;; 인간에게는 각기 하나 이상의 재능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 있다. 평생을 그 한가지 재능도 발견못해 아둥바둥 살아가는 인간도 있는데, 가끔 2~3개의 재능을 하사받은 축복받은 인간은 잘도 그 것을 발견하여 마음껏 발산하고 산다. 아- 질투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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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2007-04-13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나오자마자 서점에 바로 주문해서 사봤었는데..^^ 재밌게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제불찰 씨 이야기 밖에 떠오르지 않는군요..그 이야긴 정말 재밌게 읽었거든요..내용도 전개도 정말 제 스타일이었지요 ㅎㅎ 다소님의 덧글 2번은 저도 정말 공감하는 바입니다..질투나요 ㅋㅋ

다소 2007-04-14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홀 님 / 출간 당시에 출판계에 굉장히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해요. 구성이며 종이질, 일러스트, 내용까지 뭔가 새로운 느낌이었거든요. 최근에 오디오북도 나왔다고 들었는데, 언제 한번 구입해서 들어본다,들어본다 하고선 아직 못 들어봤네요. 조만간 정말로 시간 내서 들어봐야겠어요.
 
하드보일드 하드 럭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요시토모 나라 그림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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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8곡이 수록된 '머라이어 캐리'의 베스트앨범 '#1'을 틀어놓고, 그때부터 읽기 시작해서 16번째 트랙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 읽어버렸다. 글자 하나하나 정성들여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분량이 적은 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읽었던 시간만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딱히 어려운 내용은 아니지만 '왜 <하드보일드 하드 럭>이란 제목인가?'와 '두가지 이야기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를 생각하면 가볍게 넘길 수는 없는 책이다.

책은 두 파트로 나뉘어 진다. <하드보일드>파트와 <하드 럭>파트.

첫번째 파트는 (아주)살짝 공포스럽달까? 주인공이 가는 곳에 예상치 못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유령이 나오기도 하니까... 요즘처럼 더운 열대야에 읽으면 살짝 더위가 가시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워낙에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어, 그 공포감은 몇 초도 안되어 사라져버린다.
여자이면서도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던 주인공은 그 사랑했던 여자, '치즈루'에 관해서 잊고 살다가 홀로 여행을 하던중 그녀를 생각해내게 된다.
그리고 낮에 보았던 이상한 사당, 맛이 없던 우동집, 낡고 허름한 호텔... 그곳에서 꾸었던 꿈과 기이한 사건은 치즈루에 대한 그녀의 기억을 점점 선명하게 드러낸다.

두번째 파트는 결혼을 앞두고 퇴직을 위해 무리하게 일을 마무리짓다가 과로로 쓰러져 죽음의 길을 가게 된 언니를 지켜보는 동생의 이야기이다. 언니의 입원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변화하는 생활,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되새기는 추억을 동생의 관점에서 풀어나가고 있다.

<하드보일드>와 <하드 럭>은 각각의 이야기이지만 묘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은 아무리 그것을 좋게 포장하려해도 <불운 Hard Luck>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인간은 슬픔을 건너뛰고, 외로움을 이겨내어 결국은 <하드보일드 Hard-boiled>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쉽지 않겠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버겁겠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꿈'은 그런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비상구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비상구에 언제까지나 머무를수는 없는 일.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길을 담담히 가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영원히 멈춰져버릴것 같은 시간도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면 어느새 흐르고 있고, 그것을 느끼는 순간, 내 삶도 조금씩 변화하고 발전해나간다.
자기자신을 질책하지 말고 하드보일드하게 살라는 치즈루의 말처럼 조금은 뻔뻔하게 남은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사랑했던 사람을 위하는 길이며 동시에 나를 위한 길일 것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 +

「넌, 정말 운이 강해. 그래서 좀 남다른 인생을 보내게 될 거야. 많은 일이 있겠지. 하지만 자기를 질책하면 안돼. 하드보일드하게 사는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보란 듯이 뽐내면서」55p. 치즈루.

「목욕탕에서, 옛날에 언니에게서 해외여행 기념으로 받은, 좀처럼 닳지 않았던 불가리 동물 모양 비누가, 이제는 동물 모양이 아니라 그저 딱딱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또 엉엉 울었다.
시간이, 가버린다. . .」123p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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