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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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장소가 하나쯤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슬프거나, 힘들거나 혹은 외로울 때, 그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때가 있기에 그런 장소를 하나쯤 가져두는 건 어쩐지 든든하다. 물론 기쁘거나 기분이 좋을때에도 그 장소에 있을 수 있지만...대개 그럴경우엔 여러사람과 같이 있을 때가 많으니 좋아하는 장소가 웬만큼 넓지 않는 한 수용(收容)의 문제도 있고 해서, 그런 장소는 조금 마이너스적인 기분일때 주로 애용하게 된다.

나에게도 특별히 좋아하는 장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책상 밑'이었다. 아주 어릴때 부모님이 사주신 나무로 된 책상밑에는 주로 만화책을 진열해놨었는데 그 좁은 곳에 기어 들어가서는 동그랗게 쭈그리고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만화책만 읽어대곤 했었다. 조금 커서는 책상이 바뀌고 더 넓어졌는데, 그땐 만화책을 보기보단, 슬프거나 힘든 일이 있을때 그 밑에 쭈그리고 앉아 한 밤중이 되도록 멍하니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 때론 펑펑 울기도 했었다. 지금은 책상밑에 컴퓨터 본체랑 프린터기가 차지하고 앉아 기어들어갈 데도 없다지만 그 당시엔 그 장소를 어찌나 좋아했는지 잘때도 그 밑에 머리를 집어넣고 자서 엄마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 _-;

나와 장소는 다르지만, 부엌을 좋아하는 한 여자가 있다. 어디에 있던, 어떤 모양이던 부엌이라면 그저 좋단다. 그런 여자가 부모님을 잃었다. 자신을 길러주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중엔 할머니 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부엌에서만 잠을 잔다. 아마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에서나마 위로를 받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할머니의 지인이고, 자신과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다나베씨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이 좋아하던 그 집의 부엌과 안녕을 한다. 그리고 다나베씨의 집에서 다나베의 엄마이자 아버지이기도 한 에리코씨와 함께 3명이 같이 살게 된다. 익숙하지 않던 그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고, 예전과는 또 다른 행복을 느낀다. 새로운 부엌에 선 그녀는 작은 희망과 함께 새로운 꿈을 키워간다.(키친)

이 밖에도, 책에는 '만월', '달빛 그림자'라는 소제목으로 두편의 단편이 더 실려있다. 그 중 '만월'은 '키친2'라고 해서 처음 이야기인 '키친'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3개의 단편은 공통적으로 '죽음'을 주제로 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후 '남겨진 사람들이 성장하는 과정 혹은 극복해가는 과정'이랄까? 다소 무겁고 우울한 주제지만 침울하거나 밑바닥으로 꺼지는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상처 치유를 통해 조금 행복해진 그들을 보면 흐뭇함을 느낄 수 있다.

인간 내면의 고독감이 느껴지는 책이지만 결코 그게 싫지 않은 느낌이다. 아마도 그것이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사람의 작가로서의 능력이겠지! 첫 데뷔작인 만큼 가장 바나나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그래서 더 좋아한다. 사랑스러운 책이다.

덧) 원서로 먼저 읽었는데 번역본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모국어로 되어 있으니 빨리 읽을 수 있어 좋다. 우리말로 잘 다듬어진 작품을 2시간이면 툭탁- 해 치울수 있으니 그것이 번역본의 묘미 아니겠는가? (물론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었을 경우에 그 만족을 최대화 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면 만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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