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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문도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 시공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만화에서는 가끔 트레이드 마크처럼 반복 사용되는 대사나 내레이션이 있다. <세일러 문>에서 주인공인 세라(우사기)가 적과 맞서싸울때면 어김없이 외쳐대는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어!'라던가 <아르미안의 네딸들>에서 사용되는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우리에게는 추리 만화로 잘 알려진 <소년탐정 김전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주인공인 김전일(긴다이치 하지메)이 늘상 외쳐대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가 바로 그것이다. 대관절 그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하관데 그렇게도 이름을 걸어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름만 언급해도 슬며시 태도가 바뀌는 주위 사람들이라던지 김전일의 말투를 미루어보아 '그 세계에서는 꽤나 유명한 명탐정'일 꺼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 대단한 김전일의 할아버지인 '긴다이치 코스케'가 활약한다는 <옥문도>
추리소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출간되자 마자 상당한 이슈가 되었고,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소년탐정 김전일>을 본 사람들이라면 그의 할아버지가 나온다는 이 소설에 한번쯤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역대 추리소설 1위(문예춘추)라는 타이틀을 떡-하니 달고 출간되었으니...이제는 의무적으로 봐줘야 할 것 같은 느낌.
평소라면 서점에서 판형이라던지 디자인, 대략의 내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내가 그저 광고문구와 리뷰 몇 편만 보고 바로 주문을 하다니..;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우부메의 여름>이후, 일본 추리/미스터리 소설에 매력을 느끼고 있던 찰나, 이 소설의 출간 소식은 앞,뒤 잴 것없이 주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으니 탁월한 선택!
때는 소화 21년(1946년), 전우의 유언으로 '옥문도獄門島'에 가게되는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아, 물론 그 전에 옥문도에 대한 길다면 긴 설명이 나오는데 한자를 봐도 느껴지는 이 꺼림칙한 섬 이름에 대한 유래라던지 전설 뭐 그런 것들이다.) '섬'이란 무릇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육지로, 환경에 제약을 많이 받아 다분히 배타적인데다 결속력이 강하다. 이것은 공간의 폐쇄성과 더불어 외부인이 보기에는 무서울 정도의 것이다. 이런 섬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면... 더욱이 죽은자가 묘한 방식으로 살해되었다면 느껴지는 공포심이나 음산함은 배가 된다. (물론 추리/미스터리 소설 속 장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겠지만.)
<옥문도>는 여타 유럽이나 미국의 그것과는 느낌이 판이하게 틀린 소설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섬 나라 특유의 기질이랄까... 일본에서만 형성된 독특한 인습과 전통적 가치가 사건 발생의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 특수성은 우리나라의 경우 '전설의 고향'같은 것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한恨으로 응축된 망자의 집념이 무형의 형태로 나타나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유사하다. 차이점이라면 일본은 죽은 자보다 산 자의 집념이 더 무섭게 작용한달까?(물론 그것도 어쩌면 죽은 자가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것도 동양의 신비함(?)이라고 한다면 좀 억지스럽고 무섭긴 하지만 확실히 서양 쪽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사실, 스토리 참신함은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다. 사건 진행방식과 트릭, 해결하는 과정은 <소년탐정 김전일>의 팬이라면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감안한다면 실망보다는 놀라워 해야할 것들일지도 모른다.(그저 번역본이 늦게 출간된게 아쉬울뿐.) 대신 만화와는 다르게(아니, 만화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있다. 일본의 역사와 그 속에서 형성된 전통, 독특한 섬 문화와 신앙, '하이쿠'라는 특유의 문학장르는 스토리의 진부함을 커버하고도 남으며, 오히려 품위를 더해주기까지 한다. 일본쪽 사정에 어두운 사람이라면 이런것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나 그건 걱정마시라. 친절하게 설명된 각주가 있으니 차분하게 읽기만 한다면야 오히려 지식창고에 저장할 것들이 늘어나는 셈이니 일석이조다. 다만, 각주가 나오는 빈도가 제법 잦아서 읽다가 맥이 끊기는 걸 감안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뭐 이것도 중반을 넘어가면 나아지니 염려할 것 없고... (나의 경우, 전공탓에 싫든 좋든 일본의 역사와 문화, 문학을 배웠던 것이 소설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수업시간엔 그리도 싫던 것이 뜻하지 않게 접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달까? 반갑기까지 하다. ^^)
번역은 만족스러운 편이다. (일본색이 짙은 탓에 번역하기 여간 까다롭지 않았을 이 소설을 이 정도로 번역해내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지...) 물론 가끔 매끄럽지 못한 것이 눈에 띄고, 도저히 한국말로 고칠 수 없는 것들은 일본어를 그대로 옮겨오면서 까지 직역을 했으니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정도야 눈감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전혀모르는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간혹 있기에 그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아, 책을 읽기전에 가장 궁금했던 '긴다이치 코스케가 사건을 해결하는 실력'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김전일이 걸핏하면 할아버지의 이름을 거는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다만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니어서 조금 놀랬다. 샤프한 외모에 냉철하고 야무진 성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와는 반대로 덥수록한 스타일에 긴장하면 말을 더듬고, 머리를 긁을때면 비듬이 우수수 떨어진다. 김전일이 자신의 능력을 잘 아는 능글능글하고, 뺀질이 같은 타입이라면 긴다이치 코스케는 똑똑하긴 하지만 어수룩한 시골청년 같은 타입? 뭐, 하여간 내 느낌은 그렇다. 앞으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이 계속 번역되어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상을 더 많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원서를 구해봐도 되지만 그러기엔 난 너무 게으른 아이..;;;)
덧) 1. 단서가 되는 3개의 '하이쿠'가 나올때 원문도 같이 실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속담같은 것들은 잘도 원문과 함께 실었는데 왜 그 3개의 '하이쿠'만 원문을 안 실은거지? -_-; 왜?)
2. 책을 다 읽고 책장 구석에 쳐박아 두었던 '일본 역사'와 '일본 문학사'책을 뒤적뒤적 해 본다. <옥문도>에서 언급되는 문학가들과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내용을 한번 읽어본다. 확실히 수업시간에 억지로 머릿속에 입력하려 애 쓸때보다 훨씬 쉽게 기억된다. 에이~ 조금만 더 일찍 출간 될 것이지. 그러면 시험볼 때 더 좋은 점수 받았을지도 모르는데...아쉽다! (과연-)
3. 처음 책을 받았을때는 하드커버 양장본도 아닌것이 만원이나 한다며 '너무 비싸잖아!'라고 신경질 냈었는데, 읽다보니 손에 딱 잡히는 크기와 질감, 두께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버려 '만원 값 하는군!'하며 납득하는 나! 동생은 책을 보더니 "디스커버리 같애!"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출판사가 '시공사' -_-;;
예리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