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의 3부에 실린 시들을 가장 좋아한다. 3부에 실린 시들 중에는 회사에 다니는 고단함을 노래한 시가 많다. 화석은 물론 그것들 중에서도 절창이다. 기실 우리들이 사무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은 그것이 오래된 습관이고,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리 오랜 시간을 의자에만 앉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경영주 입장에서야 걱정할 것이 없다. 봄이 오면, 겨우내 화석이 되었던 물건들을 치우고 새 물건들을 가져다 놓으면 되는 것이므로. 평생을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았지만' 남는 것은 없다. 왜 우리의 삶은 아홉 시에 시작해서 여섯 시에 끝나는 것인지. 왜 우리는 그것을 정해진 삶이라고 믿고 있는지. 낡은 의자는 달리고 싶어한다. 주인을 태우고 달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김기택의 시를 읽은 나는 안다. 우리는 달릴 수 없다. 우리는 먼지가 되어 이 세상에 남을 것이다.
이런 소설을 읽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집니다. 게다가 토마스 만이 이 소설을 27세에 썼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의 앞가림하기에도 바쁜 나이인 27세에 4세대를 조망하는, 그래서 독일의 한 시대를 소설로 써보겠다는 야심을 가진 사나이의 노력의 결과는 독자를 전율케 하는군요.이 소설의 장점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흐른다는 것에 있는 듯합니다. 소설은 오랜 세월을 담고 있음에도 막히는 곳 없이 잘 흘러갑니다. 많은 주인공들이 죽어가지만 소설가의 시선은 담담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읽는 사람의 입장은 그게 아니지요.특히나 부덴부르크 집안의 마지막 아이인 하노의 죽음은 독자를 충격에 몰아 넣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아이의 죽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결국 몰락이란 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부분은 하노가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장면이었습니다. 음악에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하노를 학교가 얼마나 망가뜨리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지금의 학교 풍경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게 더더욱 놀라운 게 되겠지요. 이제 <요셉과 그 형제들>에 도전해 볼랍니다.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책이었습니다. 일반 책에 비하면 꼭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책이었지만 야구 관련 서적으로는 나무랄데가 없었습니다. 일전에 나온 야구란 무엇인가에 이어 제대로 된 야구책들이 비로소 한 권, 두 권 나오고 있는 듯해서 반가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야구팬이 많은데 그동안 제대로 된 야구 관련 서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 야구 매니아인 저로서는 큰 불만이었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면서도 막상 책이나 잡지를 사지는 않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풍토도 좋은 책이 나오는 것을 지연한 한 이유였겠지요.대부분의 규칙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책점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어렵더군요.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다만 야구 규칙을 따로 실어주었다면 비교하면 읽을 수 있었을텐데 밑에 규칙 몇 조만 나오고 책에는 규칙이 없어서 참조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한 작은 실수만 제외한다면,...... 제법 괜찮은 책이었습니다.
나느 이 책을 회사 자료실에서 빌려서 읽었다. 읽던 도중 나는 알라딘에 이 책을 주문해서 사고야 말았다. 빌려 읽을 수 있었던 책을, 다른 책의 서너 배는 비싼 책을 기어이 사고야 말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먼저 이 책은 내 안에 자리잡고 있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나는 무엇이든 많이 알고 싶어하는 욕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속물적인 인간인 나는 그저 지식을 줄줄이 나열하는 책을읽기는 싫어한다. 지식을 풀되, 저자의 생각이 전체를 끌고 가고, 적당히 잘난 체하는 감정이 드러나면서 자신에 대한 은근한 환멸의 감정도 드러나는 그러한 책이야말로 내가 찾는 책이다. 이 책이 바로 그러한 책이다. 저자는 자기가 잘 아는 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끌고 나간다. 그러면서도 행간에서는 저자의 고민, 즉 서구 역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거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혹은 이 모든 것은 혹시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닐까, 이 느껴지는 것이다.다 읽고 나서 생각했다(물론 이러한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은 별 의미는 없다. 이런 종류의 책은 끊임없이 참고되어야 할 서적이므로.) 왜 동양사상을 이렇게 다룬 책은 없는가 하고. 사람들이 동양보다 서양을 더 친숙하게 느끼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말로만 하는 우리 것 찾기, 신물이 난다. 기초에 충실하자. 이게 이 책을 읽은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삶은 거대한 미로다, 라고 카프카는 말하고 있다. 굴이라는 작품에서 카프카의 그러한 태도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굴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왜 주인공은 굴을 파고 굴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왜 다른 이들은 주인공의 굴에 침입하는 것도 아니면서 끊임없이 방해가 되는 소리를 만드는 것일까? 이 작품에는 거기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저 읽은 다음에도 읽기 전처럼 막막하고 어두침침할 뿐이다. 다만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이것이 카프카가 바라보는 인생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나는 나의 인생에서 늘 작업 중간에 너무 많이 쉬었다.' '그 당시와 오늘사이에는 나의 청장년기가 가로놓여 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전혀 아무 것도 가로놓이지 않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카프카적인 삶,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 나가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늙어가지만 희망이란 없다. 카프카는 내 삶에 슬며시 다가와 삶의 암담함을 상기시켜 준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란? 굴 안에서 조용히 쉬던지, 아니면 끊임없이 파던지, 둘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