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 지난 시대의 끔찍한 참상들의 이미지가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전쟁, 대공황, 기후위기, 전염병의 창궐, 각종 희귀병과 정신적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 기근, 환경 재난,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
"하지만 더이상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은 지혜를 모아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희망만 가득합니다."
화면의 이미지가 바뀌어 초록빛으로 가득한 벌판, 자유롭게 뛰어노는 소,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비쳤다.
"오직 여러분 앞에 펼쳐질 행복만을 생각하십시오!"
<하이라이프 / 소유의 종말 / 김사과>
생후 백여 일이 된 아기에게 김사과의 단편 <소유의 종말>을 읽어주고 있었다. 아기의 엄마(즉 내 여동생)는 애한테 뭐 그런 어려운 책을 읽어주냐며 유아동화책이나 읽어주라고 했다. 하지만 난 조카의 동년배 남자(2025년에 두 살인 주인공)가 주인공인 근미래 소설을 읽어주는 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걸? 한국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행.학.습! 아니냐!!
침대 가죽 헤드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다. 책은 침대 매트리스에 내려놓은 채로. 내 허벅지 위에는 생후 백여 일이 된 아기가 나를 마주 보며 앉아있다. 나는 연쇄살인범과 범죄학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고 있다. 아기도 봐야 하고 소설도 읽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생후 백여 일이 된 아기가 처음 본, 유일하게 본 책 읽는 사람이 나다!
김사과의 책에서는 새 책 냄새를, 십 여 년이 된 범죄물책에서는 도서관 서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아기도 느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