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즈&이어즈>를 보고 있다. 재미있게 본 드라마였고, 길지 않은 6부작이었기에 내용을 대체로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어긋나 있었고, 어떤 건 완벽하게 누락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배서니가 야매 시술을 받아서 안구적출을 당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배서니의 친구가 당한 일이었고, 빅토르는 보트피플로 망명에 성공했다고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대니얼이 죽은 장면에서 깜짝 놀랐다. 대니얼의 사망은 내 기억 속에서는 완벽히 지워져 있었다. 또한 배서니가 절반쯤 IT휴먼이 되는 수술을 받은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이 전혀 없었다.


5부에서 배서니는 IT휴먼이 되는 수술을 받는다. 두 안구를 적출하고 그곳에 안구 모양의 렌즈를 넣었다. 뇌에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칩을 넣어서 컴퓨터의 CPU처럼 멀티 태스킹이 가능해진다. 즉 유튜브를 보면서, 이메일을 읽고, 동시에 메시지를 작성할 수 있는 뭐 그런 식. 열 손가락에는 키보드를 이식했기에 물리적 키보드가 필요 없다. 머리에서 생각한 것만으로 전화를 걸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 베서니가 이 수술을 받는 년도는 아마도 2028년?


내가 어렸을 때는 책이 귀했다. 그래서 나는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인 위인전 전집 64권을 읽고 또 읽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고려의 마지막 왕자 마의 태자가 목숨을 건지기 위해 깊은 산속에 숨어 들어가서 칡, 마 같은 뿌리 식물을 채집해서 먹는 장면에서 울었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그 누구도 그 곳에 그 책이 아직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낡은 책들, 교실 구석에 있던 반공문고(반공교육은 없어졌지만 그 흔적은 흉터처럼 남아 있던 교실)까지 죄다 읽었다. 비디오를 빌리면 반드시 2번 이상 보고 반납했고, 책대여점에서 대하소설 따위를 빌려 읽었다. 초중고 시절에 내가 구입한 책은 최소 2번 넘게 읽었고, 영화잡지는 광고 글자까지 하나하나 다 읽었다. 가끔 구입한 노래 테이프, 더 가끔 구입하던 CD는 또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요즘은 음악, 영화, 책이 너무 흔하고 너무 많다. 회사에도 신간 책이 넘치고, 집 옆에 도서관도 생겼고, 또 내가 구입하는 책까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 영화는 또 어떤가. OTT의 대홍수!! 음악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하찮은 뇌로는 다 감당할 수 없다. 배서니처럼 뇌에 칩을 때려 박지 않는 한 감상하고 망각하고, 감상하고 망각하고 하는 수밖에 없다.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고를 반복하는 먹방 유튜버처럼. 


감상이 다 뭔가. 내가 쓴 일기마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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