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라는 시간의 틀 속에서 나는 계속 살고 있다. 내가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틀 속에서 살고 있는 이유는 세상이 일주일을 기준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주 1회 욕실 청소, 주 1회 반신욕, 주 1회 세탁기 돌리기, 주 1회 장보기, 주 1회 마사지 등등을 하고 나면 매주 책 한 권 읽기, 매주 영화 두 편 보기 같은 걸 할 시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울곤 한다. 


오랜만에 조퇴하고 biff 영화를 보러 갔다. 총 3일을 조퇴하고 영화 또는 무대인사를 보러 갔는데 그 3일은 눈 뜨자마자 오후에 있을 영화 혹은 배우의 무대인사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하루종일 즐거웠다. 그래서 깨달았다. 내가 왜 20대의 한 시절에 그토록 행복했었는지를. 그리고 지금은 왜 행복하지 않은지를. 그때 나는 거의 매일을 퇴근하고 cgv 또는 시네마테크로 달려가서 영화 2편을 연속으로 보고 밤 11시 전후로 귀가하는 생활을 했었던 것이다. 집도 아니고 회사도 아닌 다른 장소에 가서 무언가 즐거움을 얻는 게 큰 행복이었나보다.


저녁 8시에 야외 오픈 시네마를 보고 밤늦게 집에 와서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날 여느 출근하는 날처럼 5시에 벌떡 일어나서 모닝홈트(절대 거를 수 없다!)를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왜냐 난 오늘도 조퇴하고 biff 영화를 보러 갈 것이기 때문!! 어제 영화는 4시 40분이었는데, 오늘 영화는 1시 30분. 3시간 빠른 설렘으로 인해 나의 신경은 온통 극장에 가 있었고, 업무는 마이동풍 그 자체였다. 이날 메인 영화는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였고 같은 상영관에서 이 영화 앞에 상영하는 영화인 <본인 출연, 제리>라는 영화는 꼽사리로 예매한 것인데 이 영화가 올해 biff에서 가장 좋았다. 영화적으로 훌륭했던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많이 와닿았다. 


<본인 출연, 제리>는 제목 그대로다. 제리라는 70대 노인(아메리칸드림을 꿈꿨던 대만계 미국 이민자)이 제리 자신으로 영화에 출연하여 자신이 당한 보이스피싱 사연을 연기한다. 그는 이미자로 미국에서 살면서 열심히 일하여 번 돈 약 10억(아마도 현재 물가를 생각하면 그 이상일 듯)을 보이스 피싱으로 다 날린다. 제리 왈 "일해서 돈을 모으기만 했어요. 돈을 써 본 적이 없어요. 아들들 결혼할 때 돈을 보태주려고 했는데, 이젠 그것도 못하게 됐어요. 쓰지 않는 돈은 의미가 없어요. 통장에 적힌 숫자일 뿐이죠."라고 말한다. 다음 영화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를 말라>는 제목이 맘에 들어서 예매했다. 러닝타임 163분. 결론부터 말하면 난 이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화가 끝나면 7시 30분일 텐데 백화점은 8시 마감이고, 샤넬 매장은 7시 반이면 마감할 것이기 때문에. 


사실 전날 영화가 4시 30분이어서 시간이 좀 있었다. 요즘 나는 샤넬 핑크색 가방이 갖고 싶다는 욕망에 부글거리고 있었고 마침 요즘 샤넬은 대기 시간 0분. 그래서 영화 시간도 남은 김에 샤넬에 가서 핑크색 가방을 이것저것 메보고 결제 직전가지 갔다가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멈췄다. 매장 직원은 늘 그렇듯이 "새 제품 재고 1개뿐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다음 날 <본인 출연, 제리>는 나에게 "쓰지 않는 돈은 의미가 없어요. 통장에 적힌 숫자일 뿐이죠."라고 했다(정확히 이렇게 말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저건 사실 늘 내가 소비할 때 하는 말이다. ㅋㅋㅋㅋㅋ 통장에 적힌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라고) 마침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를 말라>는 서사가 있는 영화가 아니었고, 사례 변주를 끝없이 하길래 이것은 영화 그만 보고 샤넬 가라는 계시라고 내 맘대로 해석하고, 생애 처음으로 극장에서 자의로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고 나왔다. 


대기시간 0분의 샤넬매장은 쾌적했고, 나는 또 이거 저거 메보고 어제 사고 싶었던 가방이 아닌 다른 핑크 가방을 샀다. 나의 쇼핑 메이트 남동생에게만 자랑을 했고, 남동생은 샤넬을 핑크로 사다니 제정신이 아니다고 비평했다. 나는 "샤넬은 핑크지!"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끼고 아껴서 통장에 숫자로 간직하다가 노인 돼서 보이스피싱 당할 바에는 샤넬 핑크색 가방에 돈 쓰는 게 현명하다!"라고 덧붙여 주장했다.


그리고 매일 출근할 때 샤넬 핑크를 메고 있다. 그래봤자 내가 샤넬 가방을 메는 시간은 5분도 되지 않는다. 가방에든 것은 폰, 차키, 립밤, 카드지갑 전부다(보통의 남자들이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는 소지품 ㅎㅎ). 가방의 1차 기능은 주얼리, 2차 기능은 주머니. 


그렇게 매일 5분씩 주얼리 기능을 하는 주머니를 들고 다녔다. 일상이 조금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조퇴를 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만큼 즐겁진 않았다. 그래서 즐거움과 설렘을 느끼고자 어제(금요일) 조퇴를 하고 영화에 전당에 가서 <어파이어>라는 영화를 봤다. 이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 대상, 독일 영화다) 씨네21 전문가 평점 8.43의 어마무시한 작품이다. 이런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매우 훌륭하다. 특히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드글드글하는 사람들을 뼈를 아주 가루로 만들어 주는데, 그게 너무 좋다. 약간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 생각도 남. 


드라마<더글로리>같은 걸 쇼파에 드러누워서 넷플릭스로 보면 그 순간은 너무너무 재미있지만, 그것이 끝났을 때 내 마음은 회색의 재가 되어 있다. 반대로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을 보고 나면 마음이 파스텔톤이 된달까, 충만해진달까, 가득 채워진 느낌이랄까. 내 마음을 채워줄 훌륭한 영화를 만날 거라는 기대가 내 하루를 설렘으로 가득차게 한다. 회사 주차장을 나와서 영화의 전당으로 운전하던 그 길이 어찌나 설레던지. 심지어 애인을 만나러 가던 때보다 더더더 설렜다. 그리고 이 점에 나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사람을 그렇게까지 안 좋아하나 싶어서. 


이번 biff에서 처음 본 영화는 <우먼 오브>라는 영화다. 주인공 아니엘라는 남자의 몸에 갇힌 채 안제이로 살면서 결혼하여 두 아이의 아빠로 살아간다. 아니엘라는 안제이가 주는 모든 정상성을 포기하고 사회의 탈구축(미셸 푸코)을 시도한다. 그리하여 직장도 잃고, 가정도 잃게 된다. 대신 자기 자신 아니엘라로 살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본 영화는 <애니멀 킹덤>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사회의 탈구축(<현대사상입문>의 미셸 푸코 사회의 탈구축을 알게 되었고)이 주제다. 심지어 이 영화는 비유도 상징도 없다. 인간이 그냥 동물이 되어 버림!!! 사회(문명)는 동물이 되어버린 인간을 감금하려고 하는데, 동물이 되어버린 인간들은 이를 거부하고 탈출하여 동물로 살고자 한다!!! 세 번째로 본 영화는 <본인 출연, 제리>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를 말라>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과로에 시달리면서 미쳐가고 있다. 그 스트레스를 부캐(얼굴 변조?) 동영상을 찍어서 해소한다. 욕과 여혐이 난무하는 동영상이다. 욕과 여혐은 이 여성 노동자가 주로 도로에서 남자들에게 당하는 욕설과 여혐의 패러디다. 영화 속 루마니아는 선팅이 연했다. 한국처럼 선팅을 찐하게 해서 운전자의 성별을 알아볼 수 없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했던 영화 ㅋㅋㅋ 


이번 28회 biff에서 본 영화들을 6글자로 요약하면 '사회의 탈구축'!!!


<현대사상입문>이라는 세상 친절한 책의 3장 푸코: 사회의 탈구축에서 내 마음은 뼈가 가루가 되도록 맞아서 매우 몹시 심각하게 방황 중이다. '자기를 감시하는 마음의 탄생', '자발적으로 얌전해짐', '생명정치(이것은 영화 <애니멀 킹덤> 그 자체)' 등등으로 인해 읽기 일시정지 상태. 마음을 추스려야 한다!!


사회는 정규직, 연애(와 결혼), 샤넬을 지나치게 미화시켰다. 자발적으로 얌전한(안전한) 삶을 선택한 나의 얌전한 반항은 23fw샤넬핑크를 구입하는 것 정도. 핑크의 톤도 매 시즌 다르니까. 매시즌 똑같은 블랙클래식을 내가 왜 사?하는 소심한 반항. 불경기에 금리도 높은데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인가! 그래서 샤넬 대기 0분. 아껴봤자 노인되서 보이스피싱으로 다 날릴 숫자일 텐데!! (퇴근 아니고) 조퇴하고 시네마테크용 영화 보러 가는 게 가장 큰 설렘이고 즐거움인 정규직의 삶.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동안 평일에는 체력을 아껴야 하니까, 소파에 드러누워서 65인치 tv로 넷플릭스 보는 것도 충분히 즐거우니까 하면서 지냈다. 체면에 걸린 듯 연애도 했지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성애에서는 항상 여자가 손해라는 것. 회사는 익숙해져서 다닐만한 것일 뿐이고. 돈을 버는 이유를 몰라서, 돈을 체감하고 싶어서 가끔 디올에 들러서 뭔가를 샀고(샤넬은 대기가 길어서 잘 안 감). 이것은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얌전한 삶. 그래서였을까 나는 작년에 biff 오픈 시네마에서 본 <미래의 범죄들>이라는 영화를 1년째 곱씹고 있고, 이 영화를 봤던 공간과 시간이 올해 영화제 전까지의 시간들에서 가장 설레고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올해도 부족한 체력임에도 오픈 시네마를 예매했다. 결과는 성공적!) 이 영화의 주인공 3총사 레아 세이두, 크리스틴 스튜어드, 비고 모텐스(영화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 개인적으론 내가 상상했던 아라곤보다 늙고 못생겨서 엄청난 실망을 안겨준 배우, 내 상상 속 아라곤 돌려줘!!)가 굉장하기 때문에 당연히 개봉할 줄 알았는데, 안 함.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틀 속에 갇혀서 주 5일 출퇴근 반복,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을 하고 나면 읽고(영화 감상 포함), 쓰는 방식으로 존재할 시간이 거의 없다. 잠도 충분히 자야하고, 운동도 매일 해야 한다. 이건 생존의 조건이라서 아니할 수 없다. 성실히 출퇴근을 한 댓가로 번 돈의 의미를 찾고자 부지런히 소비를 하는 것이 더 이상 나에게 설렘이나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완벽히 깨달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10월 알라딘 굿즈 고양이 쿠션이 갖고 싶어서 <멜랑콜리아>(굿즈 받으려고 산 노벨문학상 수상작), <가부장제의 창조>(이제서야 알게 된 훌륭한 책! 역시 이웃을 잘 만나야 함), <한나 아렌트의 생각>은 언제 읽나... 미셸 푸코, 한나 아렌트도 읽고 싶은데. 이것들을 충분히 읽으려면 출퇴근 하는 시간을 읽고 쓰는 시간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 도나 해러웨이!!(역시 이웃을 잘 만나야 함!)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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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4 1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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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8 0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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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8 1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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