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보다 가난하고 보다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와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와지는데는 침묵 속의 공감이라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생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비록 인간관계에서 연결이 필요하다고 해도 거기에는 일정한 거리가, 더 강하게 말하면 무관계성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의 자율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즉, 무관계성이야말로 존재의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관여할 필요가 있어도 너무 관여하지 않는다는 안배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버림받고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회 비판적 인식에서 보면 좀 더 관여해야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너무 관여만 하게 되면 그로 인해 감시나 지배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고, 그것에 대한 균형으로서 너무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 제가 들뢰즈에게서 끌어내고 있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다만 이 "너무 관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관여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받아들여 버리면, 사회가 냉담해져 버립니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따뜻한 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에, "지난치게 ~하지 않는다"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현대사상입문 / 지바 마사야>


일찍이 루이제 린저 언니는 니나 붓슈만의 입을 통하여 저런 엄청난 말을 하셨다. 그때 나는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었는데, 저 문장이 진짜 너무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저 문장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이렇게 일기는 쓰고 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친구는 "너는 비밀이 너무 많아."라고 했고 어떤 친구는 자신에 대해서 시시콜콜 묻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이, 내 주변에 있는 타인들의 이력과  MBTI가 전혀 궁금하지 않다. 더 정확히는 그들의 개인사와 개성에 대한 정보가 나의 두뇌 용량을 차지하는 것이 싫다. 두뇌 용량이 무한한 게 아니니까. 또한 니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나는 내 방식대로 너를 대할 거니까. 


스무 살 이후부터 나는 타인을 인상파 화가가 풍경과 사물을 파악한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직 지금 현재 내 눈에 보이는 모습과 언행만으로 그 사람을 파악한다. 특히 내가 확인할 수 없는 어떤 화려한 이력을 늘어놓는 인간은 신뢰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여행을 굉장히 많이 다녔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 여행의 결과물로서의 언행이 꼰대라면 나는 내가 확인할 수 없는 여행 이력을 늘어놓은 인간의 여행 이력을 허풍이라고 여긴다. (아니면 슬쩍 공항이름 같은 걸 물어보겠지 ㅋㅋㅋ)


당신이 그렇게 잘난 사람이라면 왜 나랑 여기서 마주하고 있는가. 애초에 vip 주차장은 진입로부터 다른데? 엘리베이터마저도 vip용은 따로 있는데. 그러니까 굳이 니 이력 따위 늘어놓지 마라고.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게 인상파적 니 이력이다, 인마.


오은영의 인기 탓일까,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살면서 받아온 상처의 내용을 줄줄이 늘어놓으면서 타인이 자신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길 바란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정말 피곤하고 싫다. 나는 아이돌의 서사도 피곤해서 안 본다. 연예인의 사생활도 피곤해서 안 본다. 그런데 내가 장삼이사일 뿐인 너의 서사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고 배려해줘야 하나? 진짜 미쳤나? 


정말 궁금한 점은 타인의 공감, 이해, 배려가 그렇게 중요한 가 하는 것. 나는 타인의 무관심이 제일 편하고 좋은데. 나한테 인사하지 마, 너의 인사받아주는 거에 에너지 낭비하고 싶지 않아. 물론 나도 인간이기에 공감, 이해, 배려가 필요하다. 단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나의 울타리 안에 들여놓은 타인 한정이다. 그것은 매우 소수이며 대체로 5명을 넘지 않는다. 내 울타리 밖에 있는 타인은 그들이 나를 칭찬을 하든 험담을 하든 나로선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 일 뿐. 


드라마 <마스크걸>의 마지막 장면의 대사는 "제 꿈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였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미워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나도 모미처럼 엄마에게 예쁘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못생겼다는 말만 많이 들었다. 심지어 내 엄마는 내 이마가 못생겼다고 하면서 항상 앞머리를 잘라줬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냐하면, 모미와 정반대로 엄마(그리고 모든 타인)의 심미안과 안목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타인이 나에 대해서 어떤 품평을 늘어놓아도 다 개 짖는 소리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잘 보이고 싶지 않다. 나 자신에게만 잘 보이고 싶다. 타인의 기분을 맞추는 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 그래서 타인의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타인이 내 기분을 맞추어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sns도 하지 않고(못하고), 그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도 하지 않는다. 그 무수한 타인들 속에서 댓글을 주고 받고, 커뮤니티에 맞는 페르소나를 만들어서 활동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피곤하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블로그(서재) 정도. 블로그는 화자가 1명이라서 그나마 견딜 수 있는데, 불특정 다수의 화자가 많은 커뮤니티는 불가능. 


나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인정받고(사랑받고) 싶어서 그토록 비굴하고 처절하게(심지어는 자살을 할 정도까지) 사는지 몰랐다.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나는 누가 나를 미워하는지 좋아하는지 관심도 없어서 용기를 낼 것도 없는데. "저리 가, 너한테 관심 없어." 사랑받기 불가능한 존재라는 내면의 깊은 자각에서 나온 방어기제라고 누군가 나를 분석할지라도. 나는 그 분석조차 관심없다(그건 니 생각이고).


최근에 나는 내 언행에 대한 타인의 반응 자체를 생각하지 않고 거침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남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것도 수용하고, 남 눈치 보고 자신의 언행을 제어하는 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또한 나는 타인에 대해서, 타인의 언행에 대해서 아무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이 어떤 언행을 하든 그게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 사실 자체는 인식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판단하거나 기억해 두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도 바빠서 타인의 언행에 대해서 곱씹고 잘했니 잘못했니할 겨를도 없다.


"니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관심 없다. 다만 내 영역에 허락 없이 침범해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이해해 달라 배려해 달라, 그런 거 하지 마." 


<현대사상입문>에서 저 구절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다. '아하, 그랬구나. 내가 바랐던 건 바로 무관계성에서만 가질 수 있는 자율성(자유)였구나!'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는 내가 나 자신에게 이해받기 위함, 배려받기 위함이지 이 일기를 읽는 타자에게 이해(공감, 배려)받기 위함이 아니다. 라캉 이론은 1% 정도 알지만, 이쯤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믿어야 할 대타자는 나 자신 말고는 없다는 것. 


p.s1. 일기를 쓰는 행위는 옷장을 정리하는 것과 같다. 옷장을 정리한다고 해서 없는 옷이 더 생겨나는 것은 아니지만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이 정확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할 수 것처럼 일기를 쓴다고 해서 없던 생각을 더 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가진 생각을 더 명확히 할 수 있으므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적어도 우울증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 (백상현에 의하면 라깡이 그랬다던데. 자신을 표현할 언어가 부족해서 우울증에 걸리는 거라고)


p.s2. 이런 내 생각을 다른 사람과 대화로 풀어내는 것보다 혼자 일기를 쓰는 게 만 배는 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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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9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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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0 08: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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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0 1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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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2 08: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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