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히데오의 <항구 마을 식당>을 읽었습니다.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가 출판사 신초에서 나오는 잡지 <여행>의 기획으로 배를 타고 항구 마을에 가서 맛있는 것을 잔뜩 먹고 옵니다. 그게 다입니다. 절경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도 없고(도보 20분 이상 코스는 작가 없이 카메라맨 혼자 가서 사진을 찍어 옵니다)

(중략)

별 놀라운 에피소드나 삶의 깨달음도 없습니다. 책 내내 배를 타고 그 안에서 졸다가 현지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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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경이 있다고 해도 도보 20분이 넘으면 거리낌 없이 패스하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스낵바에서 수다 떨기)을 어디에서든 한결같이 추구하는 여행을 한 적이 있는가.

<당신께 / 오지은>



나는 여행 자체를 좋아하진 않는다. 내가 여행을 하는 경우는 내 눈으로 내 몸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 확인한 지금은 딱히 여행에 대한 갈망은 없다. 얼마 전에 갑자기 호텔 1박을 할 일이 생겨서 부랴부랴 짐을 싸는데 짐을 싸는 행위가 에베레스트 등반 짐을 싸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간단히 말하면 정말 귀찮았다. 폰충전기, 맥북충전기, 드라이기, 멀티탭 등등등등등. 숙소에서 짐을 풀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짐을 싸고, 집에 와서 다시 짐을 풀어서 원래 자리에 물건들을 놓아두는 행위에 진절머리는 내면서 내 인생에 다시는 외박은 없다고 외쳤다. 리모와 급은 아니지만 나름 고급의 북유럽 브랜드의 기내용 트렁크를 구입해서 단 2번 사용했을 뿐인데 말이데 기내용 트렁크에 짐 싸기에 지쳐버림. 


이번 주말에서야 <더 글로리> part2를 봤다. 지난주에 보고 싶었지만 금요일 저녁에는 잠이 쏟아져서 일찍 잤고 토요일부터 봐야지 했지만 토요일 내내 아팠기에(<더 글로리>를 볼 체력조차 없었다) 못 보고 일요일에는 9화부터 16화까지 총 8화를 다 볼 자신이 없어서 시작하지 않았다. 물론 일요일에 보고 월, 화, 수 정도에 나누어서 봐도 되겠지만, 이런 재미있는 드라마에 노동이 끼어들어서 훼방 놓는 거 질색이라서. 고단한 인생이 끼어들면 재미가 줄어든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이번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보고 세상이 더 싫어졌다. 나는 이 영화가 모든 것에서 다 별로였다. 일단 나는 너드물이 싫고, 부모는 나도 첨이라서 너무 힘들어 징징도 싫고, 다중우주적 정신승리물도 싫고, 산만한 영화도 싫다. 이 영화가 2023년 현재 인류의 정서라는 것이 참으로 실망스럽다. 무엇보다 편집상이라니... 


최근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던 영화는 <애프터 양>이다. 내가 영화에서 바라는 감각적 쾌락, 철학적 쾌락이 이 영화에는 완벽하게 있다. 


2023년을 살아가는 인류의 다수는 다중우주 중 어딘가의 '나'가 나인가? 미쓰 홍당무의 미숙의 대사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나를 사랑해 줬을 거면서." 그 말인가? 


다중우주=회빙환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뭘 굳이 그렇게까지 잘 살아보려고 하니? 하는 심정. 죽이 되든 똥이 되든 1번인 인생도 매우 싫다. 1번뿐이고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그나마 천만다행인 거야. 돌이킬 수 있고 수습할 수 있고 무한반복이라고 생각하면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다. 


그렇지만 노드하우스가 제창한 이산화탄소 삭감률을 준수하면, 지구의 평균 기온은 2100년까지 무려 섭씨 3.5도나 올라가버린다. 이 말은 경제학이 도출한 최적의 답은 '기후 변화에 실질적으로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중략)

2020년 6월에는 시베리아의 기온이 38도까지 올랐다. 북극권 사상 최고 기온일 가능성이 있다. 영구동토가 녹으면 메탄가스가 대량으로 방출되어 기후 변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영구동토에서 수은이 유출되거나 탄저균 같은 세균과 바이러스가 퍼져 나갈 위험성도 있다. 북극곰 역시 둥지를 잃을 것이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사이토 고헤이>


2100년 말고 2030년 2040년이어도 난 괜찮을 거 같은데. 2100년은 그냥 상징적인 숫자 아닐까? 지금 성인인 사람들 중에서 2100년까지 살아 있을 사람은 없으니까 대부분의 성인이 사망했을 가장 가까운 년도로 고른 게 2100년 아닐까? 다들 안심하라고 2100년이라고 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다중우주와 회빙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를 외면하고 지구온난화 없는 어떤 다중우주를 상상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될 거 같다. 


적극적으로 죽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내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지겹다. 사는 게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걸까? 사는 게 자식을 낳아서 자식에게 너도 한 번 살아봐라고 권할 정도로 좋은가? 100세까지 살고 싶을 정도로 좋은가? 난 둘 다 싫은데.


절경이 펼쳐지더라도 도보 20분 이상의 거리라면 가지 않겠다는 오쿠다 히데오의 여행에 대한 자세가 내가 삶에 대해서 가지는 자세다. 간단히 말해서 고진감래 싫다고. 


윤여정이나 제이미 리 커티스처럼 70대에 생애 첫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을 수 있으니 그래도 계속 살아보는 게 좋지 않겠니?라고 성공한 사람들은 어디선가 강연을 하겠지만, 내 손에 쥐고 있는 카드로 나는 매일의 게임을 해야하는데 일단 그게 너무 지겹습니다. 지겹고 체력이 많이 소모돼서 지칩니다. 내가 호소하는 고통은 물리적으로 체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베터리 성능이 50%도 안 되는 스마트폰 같은 육체로 하루를 버텨야 하는 매일의 과제가 버겁습니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할 때는 잠잘 때입니다. 그래서 나는 금토일 3일 동안 30시간을 잡니다. 그리고 주중에도 8시간을 잡니다. 어쩌면 나는 사는 게 싫어서 잠을 많이 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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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3-24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말엔 쓰리 빌보드를 봤거든요, 이번 주말엔 애프터 양을 보겠어요.
에에올의 경우 저도 으아아 편집 너무 싫고 이게 뭐야... 하다가 또 cj 감성답게 엉엉울었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

먼데이 2023-03-25 09:58   좋아요 0 | URL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 역)같은 엄마를 정말 정말 싫어합니다. 자식이 부모 맘에 들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그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님) 자식에게 악다구니를 퍼붓는 사람 정말 싫습니다. 악다구니를 퍼붓는 이유는 자식이 만만하고 약자니까 화풀이 하는 거잖아요?

그래놓고 애가 실종되니까 참부모였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 전 위선이라고 보고요. 가축을 대하는 축산농부의 태도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축산농부들도 홍수에 소가 떠내려가면 울어요. 돈이니까요, 내꺼니까요. 내 재산이니까요. 그래놓고 소를 팔아서 죽게 하지요.

전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가축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꺼, 내 자산, 내 재산이라고.

지금 검색해보니 이 영화 전문가 별점이 8점 이상이네요. 역시...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하나봐야.
근쩍한 인간애, 개과천선, 부모서사.

에에올도 싫은 이유는 부모서사. 그리고 너드의 화장실 유머(그걸 어떻게 견디나요? 전 백인남자너드유머 진짜 싫어하거든요. 트로피 항문 유머 장면에서 진심 아 시발 했습니다. 진짜 싫어요.)

<애프터 양>은 서사, 음악, 화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세련 그 차제. 이 영화 감독이 드라마 <파친코>도 만들었는데, 감각이 쩌는 게, 오프닝이 정말 뮤직비디오예요. 한번도 오프닝 건더뛰기 한 적 없고 오히려 되감기 해서 오프닝만 반복해서 봤을 정도예요.

공쟝쟝 2023-03-25 10:34   좋아요 0 | URL
일단 경험해야하는 영상매체 잘 안보는 데다가 외국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보지는 않아서 1세계 백인남 유머 잘 몰라요 ㅋㅋㅋㅋ 근데 계속 나오는 안맞는 어떤 부분들이 있었고, 그게 뭔지 생각해볼게요! (불편하거나 불쾌한 감정을 잘 느낄 줄 ‘알아야‘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ㅋㅋㅋ)
랑 별개로 시각이나 연출적으로 뭐가 아름다운 지는 뭐랄까 그냥 좀 아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 애프터 양 고고싱~

공쟝쟝 2023-03-2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가장 강요하고 옹호하는 게 인간, 개과천선, 가족애 잖아요? 그래서 저는 자동반사 적으로 몸이 반응해. 이미 울고 있음 ㅋㅋㅋㅋㅋ 익숙한 정서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영화 드라마들이 가리키는 무의식에 대해서 결국 당신들이 말하고 싶은게 이런저런거 라면 나는 여기까지는 내가 오케이 그렇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그게 맞는가? 라고 물어보는 것 같고. 그 부분에서 그... <나의 해방일지>작가가 대단히 반동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대중들이 뭘 좋아하는 지를 알아서 껴넣은 게 아니라 정말로 이것이 인간이다! ㅋㅋㅋ뭐 그런 의미로 보여주고 싶은 철학이 있는데 철학이 꼰대인... ㅋㅋㅋ 내가 살아봤는 데, 니들 그거 아니다~ 이런 게 느껴져여 ㅋㅋㅋㅋ (걍 이야기 재밌게 잘하는 오십대 아저씨한테 지 인생 이야기 듣는 느낌..)
쓰리 빌보드 저는 허약한 백인 남성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봤습니다. ㅋㅋㅋㅋ 감독이 좋아하거나 옹호한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고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ㅋㅋㅋ 이건 뭐글로 적을 수 있으면 좋겠는 데 모르겠다. 구찮아욬ㅋㅋㅋㅋ 다 구찮닼ㅋㅋㅋ

먼데이 2023-03-26 09:21   좋아요 0 | URL
방금 <나의 해방일지>작가 프로필을 봤는데, 이 작가의 작품을 1개(90일 사랑할 시간) 빼고 다 봤고 다 좋아해요 ㅜㅜ <올드미스 다이어리>와 <청담동 살아요> 완전 좋아해요. 특히 <청담동 살아요>는 주변에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혹자 묵묵히 봤음 ㅠㅠ 김혜자 진짜 웃겼어요. <또 오해영>은 한국 로코 최고작이라며 ㅠㅠㅠㅠ <나의 아저씨>는 이상하게도 빨려 들어서 다 봤고, <나의 해방일지>는 염창희의 모든 것이 좋았어요. 염창희가 느끼는 삶의 불쾌가 내가 느끼는 삶의 불쾌와 매우 흡사하거든요. 심지어 저도 운전하는 거 좋아해요.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철학이 꼰대 ㅜㅜㅜㅜㅜ 저도 제 주장을 굽히지 않는 먹통의 면모가 있어요.

공쟝쟝 2023-03-2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프터 양> 봤어요! 먼데이님. 저 이 영화 최애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릴리슈슈 ost.. 완벽했다. 한편의 영화가 이렇게까지 쾌락을 줄 수 있다니……. 난 영화를 별로 안좋아하는 게 아니라 웬만한 영화는 양에 차지 않는 것이었던 것이다. ㅋㅋㅋ

먼데이 2023-03-26 09:22   좋아요 0 | URL
<애프터 양> 모든 것이 아름답죠? 전 그냥 ‘아...너무 아름답다. 눈과 귀, 머리 속까지 너무 즐겁다.‘ 느꼈던 영화예요. glide는 릴리슈슈보다 애프터양에 더 잘 어울릴 지경 ㅋㅋㅋ 코고나다 천재!

공쟝쟝님 안목 높으십니다. cj감성은 노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