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클럽>175회 김혜리 기자의 "이 영화를 보고 안 울면 로봇입니다."라는 말에 이끌려서 <아이언 자이언트>를 봤는데 나는 로봇이었다. 그냥 마지막 장면을 보고는 복선이 훌륭한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엔딩 크레딧 계속 보기를 클릭하고 멍하니 '왜 나는 슬프지가 않나...'를 곱씹었을 뿐. 나도 <빅 히어로>를 보고 엉엉 울었던 사람인데... 아직도 이 영화를 생각하면 슬픈데ㅜㅜㅜ 


이어서 본 영화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늘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보진 않고 미뤄뒀었는데 어제는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에 홀려서 봤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영화는 최근까지도 <여름의 조각들>이 전부였다. <여름의 조각들>은 진지하게 본 것만 10번이 넘을 것이다. 이 영화의 무엇이 좋냐 하면 식사씬(먹는 것을 싫어하는 나지만 이 영화의 식사씬 무려 가족 식사씬이 너무 좋았다)과 부모의 유산을 서로 물려받으려고 품위 있게 싸우는 것도 좋았다. 얼마 전에 재개봉한 <이마 베프>를 봤는데 와우, 이 영화에서도 식사씬이 너무 좋은 거다. 나는 질 좋은 나무 식탁에 와인잔과 가정식이 놓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조용히 또박또박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너무 좋다. 비슷한 이유로 <다가오는 것들>에서 마당 식사씬과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의 풀밭 식사씬(이건 정말 최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릭 로메르 영화!!!!!!!!!!!>도 좋아한다. 그런데 이 영화 <클라우스 오브 실스마리아>는 두 주인공의 대화와 식사가 영화의 절반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스위스의 절경. 슬펐다면 이 영화가 좀 더 슬펐다. 발렌틴 때문에...


필름클럽 175회에서 "갭이어, 1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얼 하고 싶나요?"라는 질문에 김혜리 기자는 "일주일에 이틀은 드로잉을 하고 이틀은 피아노를 연습하고 사흘은 일기를 쓰겠어요. 그리고 마지막 한 달에는 신변정리, 하드디스크, 편지, 유언장, 언제 어떤 일을 당해도 깔끔하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해두고 싶어요."라고 했다.


사.흘.은.일.기.를.쓰.겠.어.요.

이 말이 얼마나 좋던지.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는 마땅한 대화상대가 없어서 이기도 하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보면서도 저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내 생각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라는 말을 엄청 많이 들었고, 나는 이제 대화 자체를 포기했다. 하다 못해 만인의 슬램덩크라고 하더라도 내가 기억하는 걸 말하면 사람들은 처음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교실에서 그 친구가 나에게 소년챔프에서 찢어낸 페이지를 건네주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기억력이 좋다. 많은 것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날도 생생히 기억한다. 우리들은 1학년 책도 기억한다. 제일 먼저 무엇을 배웠는지도 기억한다. 최초의 기억은 3살 즈음. 그때 엄마는 나를 가지고 장난을 쳤고 나는 그게 싫어서 울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따져 물었더니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고 했지만, 그렇다 나는 기억을 잘한다. 어린 시절 앨범 속 사진을 보면 그 날의 사건들을 다 설명할 수 있다. 왜 그 옷을 입었는지, 그 사진은 왜 찍게 되었는지, 내 기분은 어땠는지. 그걸 말하면 엄마는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냐고 하지만, 그게 내 불행의 시작인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애니까 함부로 해도 되겠지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으로 자신 위주로 양육을 했을 건데, 자식인 나는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으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 태어난 건지, 왜 죽을 때까지는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왜 나는 쓰레기를 자꾸 만들어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이 마음과 기분을 일기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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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3-02-12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레네트와 미라벨... 이 영화 정말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영화죠. 로메르 영화답습니다. 로메르의 내 연자친구의 남자친구는 더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로메르 좋아하신다면 강추합니다.

먼데이 2023-02-13 14:13   좋아요 1 | URL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는 십여 년 전에 에릭 로메르 특별전에서 본 이후로 본 적이 없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레네트와 미라벨도 극장에서 본 건 1번이고, 운 좋게(?) 파일을 구하게 돼서 여러 번 봤어요. 전 <보름달이 뜨는 밤>도 좋아하는데 이건 극장에서 2번 본 이후로는 볼 기회가 없더라고요. 영화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