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2년은 정말 대단하다. 나 같은 인도어형 인간도 아웃도어형으로 변이 시키니 말이다. 20ssfw와 21ss를 잠과 넷플릭스로 채우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육체의 근육은 사라지고 그 사라진 자리를 곰팡이들이 가득 메우고 있을 거라는 망상이 들었다. 거동이 불편 해지기 전에, 관절에 아직 염이 붙기 전에, 어서어서 야외를 돌아다녀야 한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정언명령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매주 토요일 걷기 모임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평일 출근 시각과 비슷할 때 출발해서 퇴근 시각과 비슷할 때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 점심 식사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야외에서 보낸다. 걷고, 어딘가에 앉아서 쉬고, 경치를 감상하고, 고장의 유래와 유적지를 살펴보고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가을과 함께 18000보를 걷는다. 어떤 날에는 비가 내려서 하루 종일 우산을 들고 걸었다. 피곤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수동적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것이었구나를 알고 새삼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에히리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이고 존 그레이의 꼭두각시 인형이었구먼... 그랬구먼... 나는 그저 모임의 대표가 이끄는 대로 걸으면 되고 모임의 대표가 설명해주는 것을 들으면서 끄덕끄덕만 하면 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속에 스트레스라던가 자유에의 갈망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반면 나의 월화수목금은 어떠한가.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는 실내에서 필요할 때는 언제나 화장실도 갈 수 있는 그런 곳에서 고작 3000걸음 내외를 걸으면서 하루를 보내지만, 그 속에는 끊임없는 계획과 실천, 주의, 보완, 규칙과 절차와 또 주의주의주의... 내 이성은 스트레스받지 않는다라고 자기 암시를 하지만 퇴근하고 집에 오면 나는 완전 방전이 되어서 자는 것 말고는 그 무엇도 할 기력이 없는 녹초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절대신의 명령에 복종했던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 노예가 자신의 삶을 개척해서 사는 현대의 노동자보다 덜 불행하고 덜 스트레스받았다라는 누군가의 말을 헛소리하시네 라고 비웃었는데 그게 헛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제는 수영강 주변을 걸었다. 그래서 나는 도심지만 걷나 보다 하고 프라다 버킷햇을 쓰고 발망 청바지를 입었는데, 마지막 코스가 등산(?)이었다. 그래 부산이 왜 산인가... 산이 많아서 산이지... 아 이런 차림으로 등산(?)을 하다니 ㅜ 새가 모자에 새똥 싸는 건 아니겠지? 산길 오르다가 바지에 풀물 드는 건 아니겠지? 하는 근심까지 더해져서 가파른 등산로가 더 가파르게 느껴졌다. 정상에 오르자 시야가 확 트이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속세를 내려다보는 조물주의 기분으로 산 아래 도심지를 내려다보는데, 늘 그렇듯이 분위기 깨는 말이 들려온다. 나를 제외한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의 관심사, 기승전아파트. 번식과 아파트 말고는 도무지 이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인생의 비극. 아마도 그래서 내가 집안에 칩거를 했나 보다. 그런 무리들을 피하고 싶어서. 집 밖에 나오면 피할 길이 없다. 산을 내려올 때는 반대쪽 경사가 낮은 곳으로 내려왔는데, 그쪽 길에는 절이 있었다. 번식과 아파트가 인생의 목적인 그들인지라 역시나 절에서는 무언가 부귀영화를 간절하게 빌었다. 굳이 대웅전에 들어가서 뭔가를 빌고 있었고, 나는 대웅전 벽 둘레에 그려진 부처의 일대기 그림을 보면서 대표의 설명을 들었다. '부처는 고집멸도, 윤회의 사슬을 끊어.'라고 가르쳤는데 왜 부처를 믿는 중생들은 부귀영화만을 빌고 또 비는 걸까? 나는 부처에게도 예수에게도 딱히 기도를 할 게 없다. 그저 나의 고통과 집착이 멸하기만을 바라고, 다시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거 하나뿐인데 그게 기도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 않는가... 부처가 정말 자비가 넘치는 존재라면 고통과 절망이 압도적으로 가득한 속세에 나를 태어나게 내버려 두었겠는가...


걷는 사람 하정우는 아니지만 올 가을에는 계속 걷기로 한다. 걷기 메이트들은 죄다 번식과 아파트라는 부귀영화에 눈 먼 좀비들이지만... 그게 나의 카르마라면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걸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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