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런 당찬 마음과 무관하게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술을 사랑한 죄, 예술을 보기만 하거나 폄하하기만 하지 않고 굳이 꼭 내 손으로 직접 하고자 한 죄, 그것은 그대로 온오프라인 월세에 빈틈없이 반영되어 매달 국내외의 집주인 친구들을 쉴 틈 없이 부양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 이반지하>


얼마 전 동생이 내 집에 와서 며칠 지내다 갔다. 지내면서 하는 말이 내가 그르누이 같다고 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출세작 <향수>의 그 그르누이 말이다! 풀이하자면 집에 생활의 흔적(더러움, 얼룩 등)이 없다는 것. 특히 화장실이 너무 깨끗하다. 물때가 없다고 신기하다고 했다. 동생은 지난번 방문 때도 내 화장실의 청결도에 감탄한 후 청소방법을 배워가서 얼마간은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참고로 물때는 물때 제거 스펀지로 살살살 문지른다. 스펀지는 다이소에서 구매함.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를 읽었다. 나의 생 자체가 그르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몇 권의 에세이들을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정도의 밀도로 압축하면 이 책의 50페이지 정도나 될까 싶었다. 내가 현재까지 살아온 나의 에세이를 쓴다면 이 책의 첫 에피소드 '생존자' 정도의 무게나 밀도가 될 듯싶었다. 사실 내 유일은 성취는  생존밖에 없다. 


작업실과 집을 합치기로 한 이후로는 무조건 방이 2개인 집들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투룸이라고 해서 가보면 거실과 부엌과 현관이 합쳐진 곳을 방1로 치는 경우가 많았고, 그게 아니어도 보통 방 하나가 진짜 말도 안 도게 작아서, 이거 뭐 벽은 왜 쳐놨나 싶을 때가 많았다. 또 두 방 중 한 방의 상태가 매우 안 좋아서 작업이나 생활 중 어떤 것을 포기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때도 비일비재했다. 비장한 예술가일 때는 작업실을 크고 햇빛이 잘 드는 방으로, 잠자는 방을 어둡고 벽이 삐뚤어진 방으로 정했다. 그러다 또, 아니 근데 인마 사람이 살고 봐야지 싶어질 때는 삶보다 중한 예술이 있냐고 나불대며 혼자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 생활과 작업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했다.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 이반지하>



인마 사람이 살고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밥벌이를 놔버릴까 고민중인 나로서는 '부동산과 예술하고저'와 '예술하고자 한 죄'의 모든 에피소드들을 읽고 많이 심란해졌다. 나는 나 한 몸 먹여 살리는 것도 지치고 힘든데, 예술까지 먹여 살리는 삶이라는 것은 어떤 걸까?... 그건 아마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둘 다 몹시 힘들겠지만, 적어도 나처럼 그르누이인 삶은 아닌 어떤 것일 것이다. 


예술을 하면 지겨울 틈은 없겠지, 적어도. 하지만 대신 주로는 불만족스럽고 우울할지도 몰라. 나처럼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재능을 오직 생존에 올인하면 그 생존이 어느 정도 윤택해졌을 때 죽음처럼 말기 암처럼 지겨움이 찾아와. 남은 생은 그 지겨움과 함께 해야 해. 나의 이런 기분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예술은 영화 <패터슨>이다. <패터슨>덕에 하루하루 지겹더라도 지겨움 그 자체가 가치롭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즐기려고 애쓰는 중. 



 ps.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는 내가 여태껏 읽은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 식의 에세이 최고 걸작이다.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도 좋지만 사실 동시대성이 느껴지지 않아서 내게 너무 먼 그대였다. 호프 자런의 <랩 걸>도 멀다, 나에겐, 좋긴 했지만. 더 멀리 가면 장 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명상>도 좋지만 화질이 엄청 낮은 에릭 로메르 영화를 17인치 모니터로 감상하는 기분이랄까.  좋은 건 알겠어 하지만 그 좋음을 감상하는 방법도 시대도 너무 차이가 난단 말이지. 하지만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는 영화 <기생충> 같다. 동시대성, 한국어, 4K, 봉준호처럼. 


내 책장에 나를 즐겁게 해준 좋은 책 1권이 더 추가되어서 기쁘다. 지겨운 나날 속의 어쩌다 찾아오는 즐거움이 되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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