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매사에 시큰둥하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하는 생각을 많이도 하는 나날들이다. 뭘 봐도 뭘 해도 시큰둥하다. 어렸을 때는 경험치가 쌓이면 좋을 줄 알았었는데 아니었다. 에반게리온 서 주제가 가사를 너무 믿었나. 그래도 경험치가 쌓이잖아 어쩌고 하는 가사가 뇌리에 박히던 시절. 생각해보면 그런 나이였던 것.
재미있는 책을 못 만나서 그런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책 읽기 말고는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땡볕의 한낮. 우리 집은 낮동안에는 TV조차 나오지 않던 그런 원시시대였다. 낮에 TV가 나왔나?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랬더라도 내 흥미를 끄는 프로는 없었던 듯. 나는 영화 말고는 공중파에 아무 흥미가 없었다. 비디오를 빌려 볼 돈도 비디오 가게까지 걸어갈 체력도 없었던 때. 너무 더웠다. 나는 오렌지 색으로 빛바랜 세로 줄글로 된 펄벅의 대지를 찾아낸다. 심심하니까 읽는다. 골드스타 선풍기를 1단으로 켜 두고 읽는다. 선풍기 바람이 거슬려서 선풍기를 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의지해서 읽는다. 계속 읽는다. 오란이 너무 불쌍하다. 계속 읽는다.
찬란한 여름방학이었다.
그 시절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은
나는 하복 블라우스가 1벌뿐이어서 매일 집에 오면 땀이 젖은 블라우스를 손빨래하고 탈수한 후 잠시 마당에 널었다가 다림질 하기 적당한 정도로 물기가 남았을 때 다림질을 했었다. 매일 아침 잘 다려진 깨끗한 블라우스를 입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매일 저녁의 빨래와 다림질일 수고롭다는 생각을 딱히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일종의 경건한 의식.
찬란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도 여름방학 특강 같은 걸 하는 애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냥 놀았다.
지금 나는 그 정반대 편에서 존재하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여름 흰 면티를 명품드라이클리닝을 맡기고
방마다 에어컨이 있어서 실외기를 무려 3대나 소유하고 있고
거실에는 ott 서비스가 되는 75인치 TV
서재에는 책장 가득 책
침실과 이어진 드레스룸에는 최신상 옷과 명품 가방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하.나.도.즐.겁.지.가.않.다.
나이가 든다는 것, 늙는다는 것, 경험치가 쌓인다는 것은
즐거움을 하니씩 잃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무쓸모를 깨닫기 위해서 태어난 건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