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건강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던, 요즘 유행어로 풀이하면 꾸안꾸가 가능했던 시절에는 나도 영적인 충만감 같은 걸 추구했었다. 그래서 시중에 출판된 헬렌 니어링 부부의 책을 죄다 사서는 읽고 또 읽곤 했다. 특히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레시피를 따라 하고 싶었으나 도무지 재료를 구할 수가 없어서(요즘 보다 식재료 판매 범위가 넓지 않았던 시절) 아쉬웠었다. 최근 미인가 대안학교에서 벌어진 코로나 감염사태를 봤을 때는 스콧 니어링 자서전에서 읽은 그가 세운 학교가 생각나면서 피식 웃었다. 그런 식의 학교는 그가 학교를 세워 경영했던 100년 전에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저 하나의 안아키 집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몇 년 전 자동차 구입을 시작으로 나는 물신주의에 물들기 시작했고, 전 지구적으로는 코로나가 개인적으로는 건강을 잃기 시작한 작년, 궁여지책으로 조금이라도 더 즐거워지고 싶어서 내가 취한 행동은 영적인 충만이 아닌 내 손에 쥐어지는 물리적 충족이었다. 의식주 중에서 의생활에 가장 큰 비중을 두는 관계로 옷을 사고 또 샀다. 옷만이 아니고 액세서리도 사고 또 사고했다. 기분전환에 옷과 장신구만 한 것이 없다는 주의다. 신체의 긍정적 변화를 위해 고행 같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고, 헤어 스타일 변화처럼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음식처럼 먹는 순간에는 즐겁지만 그 즐거움은 길어봤자 1시간 정도에 불과한, 더 나아가서는 기분을 좋게 하는 음식이 건강을 나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옷만큼 즉각적으로 나를 변신시키면서 긴 시간(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 기분)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없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그래서 한창 자아정체성을 확립해 가던 고등학교 시절의 복장과 두발에 대한 학칙은 정서적 학대 혹은 학살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학교가 감옥같이 여겨진 것의 큰 이유가 교복 및 복장 두발 단속 탓이었던 이유가 크다. 양말, 헤어 액세서리, 신발까지 단속했으니...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그런 이유로 내가 진로를 결정할 때 일 순위로 제거한 직업은 유니폼이 있는 모든 직업이었다. 의생활에 관해선 태초의 아담과 이브에서 전혀 진화하지 못한 인류, 즉 의복을 수치심을 줄이고 더위와 추위로부터의 신체 보호 정도의 수단으로 대접하는 인간들이 남의 복장에 대해서 TPO 운운하면서 옷이 짧네, 화려하네, 직업에 맞지 않네, 단정하지 못하다고 트집 잡는 걸 보면 유전자 깊숙이 잠들어 있는 수렵 본능에 근거한 살생 욕구가 느껴질 때가 있다. 타인의 복장과 두발에 대한 지적질과 간섭은  전체주의적 본능, 즉 지배욕 이상도 이하도 하니다. 그래서 한 때 내가 미니멀리즘에 빠졌을 때 읽었던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 의복 편은 어떤 부분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물론 미니멀리즘도 좋지만, 남의 의복 취향에 평가해가면서 일해라절해라 하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나이 들어서 꽃 프린트 화사한 블라우스 입을 수도 있지!!!!!! 왜 그걸 비난해? 니가 뭔데??? 회색, 베이지, 블랙만 사 입으라니!!!! 이건 뭐 음식으로 치면 초저염식만 먹고살라는 것과 진배 없는 말 아닌가!!!!! 

뒤늦게 행복과 의생활의 상관관계를 깨달은 남동생의 일화를 조금 서술해 둔다.
사회 초년생의 빠듯한 지갑 사정으로 인해 나뭇잎에 의존해서 약간의 수치심을 가리고 정도의 의생활을 한 태초의 아담 같은 의생활을 했던 추구했던 남동생은 "옷은 유니클로면 충분하지."라고 하면서 생필품을 리필하는 것보다 더 성의 없는 자세로 유니클로에서 양말, 팬티, 바지, 후리스 등을 구입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손에 이끌려 '솔리드'를 접신한 후 금단의 사과 맛을 본 아담이 되어 버렸다. 이어서 나는 우영미 선생님의 세계로 남동생을 인도했고, 남동생은 인생은 짧고 패션은 길기에, spa 브랜드에 인생을 낭비할 day가 단 하루도 없다고 했다. 우영미 모직 셔츠를 입고 출근했던 날, 마데 이태리가 최고야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회사 상사가 동생에게 "내가 이 회사에서 우영미를 보게 될 날이 올 줄을 몰랐다."라고 감격해했다고 한다. 메종 키츠네 로고 여우를 보고 그건 시바견이야 하고 묻는 패알못 회사 동료도 우영미 셔츠에서는 디자인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생리통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먹어두는 진통제처럼 나는 우울하기 전에 미리 옷을 사 둔다. 품절, 추가 세일, 셋업 상품, 관부과세까지 계산해가면서 치밀하게 우울을 예방하고 있다. 그래서 느긋하게 책 읽을 시간이 더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품절될 거 같아서 구입한 옷이 품절은 고사하고 추가 세일 항목이 되면 조금은 기분이 다운되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내 이득만을 취할 수는 없으니 다음번에는 더 잘해보자라고 생각을 하는 한편, 아 나는 절대 주식하면 안 되지 안돼 하는 생각도 한다. 빨리 입고 싶어서 비싸게 산 옷이 반값에 팔리고 있는 걸 보면 아직도 맘이 쓰리다. 그렇지만 반대로 좀 느긋하게 기다려서 엄청 할인받아서 산 옷도 있으니깐... 주식 시장만큼 알 수 없는 것이 패션계의 품절과 추가 세일이다. 이건 분명 품절될 각인데 하는 게 비인기 상품이기도 하고, 어떤 건 세일까지 가지도 않고 판매중지 후 다음 시즌에 정상가로 팔리기도 하고. 천조국 미국의 의류 판매 경영철학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울해지기 전에 미리 우울 예방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을 때는 버티고 버티다가 우울과 피곤이 겹쳤을 때가 되어서야 지친 육신을 이끌고 백화점으로 가서 즐겨 찾는 브랜드에서 이거 저거 따지지도 않고 대충 입어보고 몸에 맞는 건 다 사버리기도 했다. 우울할 때는 과소비를 하게 된다. 또는 합리적 계산과 기다림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비싸게 구매하게 된다. 그런 손실을 줄이고자 요즘 나는 상비약처럼 옷을 미리미리 사두고 단 하루도 이상한 의복을 입지 않도록 늘 준비해둔다. 

이런 이유로 나는 물신주의자가 되었다. 누군가가 보기엔 내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옷을 버리고 사고 버리고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나는 옷 수집가는 아니다. 더 이상 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는 옷은 미련 없이 떠나보낸다. 본전이 생각나서, 추억 때문에 간직하는 옷 같은 건 없다. 나에게 옷은 철저하게 실용주의의 영역일 뿐이라서 단지 소유했다는 것만으로는 전혀 즐겁지 않다. 입지 못하는 옷을 소장해 두는 건 그저 공간 낭비일 뿐이다.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두는 옷이나 가방 같은 것은 없다. 내가 그 옷과 가방을 착용하는 날이 특별한 날이다. 

나는 내가 고작 옷을 사는 것만으로 즐거울 수 있고, 스스로 즐거워지는 방법을 찾아낸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술, 고기, 담배, 마약, 집착과 다른 없어 보이는 수집벽 같이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 것을 취하지도 않으며 악플, 정치, 도박과 다름 없어 보이는 주식, 부동산 투기, 자식 낳아서 대리 욕구 충족하기, 중성화 수술까지 시키면서 동물 반려하기 등처럼 다른 존재를 불행(의존 혹은 이용)하게 하는 것도 아닌 그저 나 자신을 조금 아름답게 꾸미는 것으로 우울을 방어하고 있다는 점에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집에 있을 때는 대체로 즐겁다. 집사로서 집안을 운영해 나가는 것은 조금 성가시긴 하지만 회사에서 노동하는 것에 비하면 즐거움의 영역이다. 심지어 나는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손빨래를 하거나 집안을 청소, 정리 정돈하는 것을 좋아하기까지 한다. 내 인생 대부분의 불행은 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고, 회사에서도 나는 유사한 불행을 느낀다. 억압당하고 있다, 자유가 없다, 싫은 것을 해야 한다, 싫어하는 사람을 봐야 한다는 점 등등.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내가 깨어있을 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회사이기에 나는 그 회사에서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불행을 줄이고 싶은 것이다. 회사에서 일을 함과 동시에 내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은 옷 말고는 없다. 영화보기, 책 읽기도 내 기분을 좋게 하긴 하지만 그것을 회사에서 일을 하는 동시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옷은 다르다. 일을 함과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의 시간은 고되지만 그 긴 시간 내내 내가 원하는 옷을 입고 있어서 조금은 덜 불행하다. 

어떤 물건을 구매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즉각적으로 불행을 희석할 수 있는 성향이야 말로 축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건 구매로부터 불행을 희석하지 못한다. 물건을 통해서 불행을 희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술 고기 중독자가 되거나, 주식& 부동산 투자(투기?)에 빠지거나, 일중독자가 되어서 가족을 방임하고 집안을 방치한다.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 힘들어서 더 손쉬운 다른 존재(주로는 자식과 반려동물)을 관리하는 하는 것으로 지배욕을 채운다. 앞에 열거한 부류 중에서 일중독자가 제일 같잖다. 자신이 엄청 유능한 줄 아는데 너는 무책임하고 게을러서 그저 일로 도피했을 뿐이거든. 내 일상에  술 고기, 주식, 부동산, 일, 다른 존재에 관한 중독은 전혀 없다. 다만 나는 내가 무엇을 구매하면 불행이 희석 되지를 알아내고 그것을 구매할 뿐이다. 그래서 술 고기, 주식, 부동산, 일, 다른 존재 사육하기에 중독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인류로서 서로 전혀 공감하지 못하면서 공존할 뿐이다. 나는 내가 좀 더 진화한 인류라고 여긴다. 미래의 인류는 결국 자기 자신과 AI(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자신 자신의 취향으로 세팅한 무언가)와 함께 할 테니 말이다. 그때 나는 자기 자신(AI)과 연애하는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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