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인간들이 가장 치열해지는 순간은 늦은 밤 수면제를 삼킨 뒤 이불 속에 누워 넷플릭스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일은 뭘 입지?' 고민하는 때가 아닐까 한다. 화면 속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빛나는 금발을 휘날리는 여성 CEO는 사악한 음모를 계획 중이고, 너덜너덜한 셔츠 속에 조각 같은 근육을 숨긴 아버지는 딸을 죽인 살인마를 찾아 숲속을 헤맨다. 혹은 외계인이 슈퍼마켓에 나타난다거나, 잔다르크가 사실은 남자였다거나... 하지만 솔직히 별 관심 없고, 대체 내일은 뭘 입고 밖에 나가야 또 하루를 생존해낼 수 있는 걸까?
<바깥은 불타는 늪 / 정신병원에 갇힘. 김사과>
돈을 버는 것에 시간과 체력을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고 거지행색으로 살까 말까 고민하던 중에 그 고민을 한 방해 해결해준 큰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인간멸종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데 그 부정적인 생각이 부정적인 기운을 만들어서 그 인간들 중에서 오직 나만 멸종될 뻔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조상을 잘 모신 덕(???????하하하하하)에 큰 화는 면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작은 화는 생겼다.
2020년 나의 테마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전사 쯤 되는 듯 싶다.
불혹이라는 나이의 의미가 '미혹되지 아니함'이라고 하던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생존을 위해 산전수전 다 겪으며 버틴 인간의 세상 만사에 닳고 닳아버려서 무감각해진 의식상태를 조금 미화해서 불혹이라 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그 '미혹되지 아니함'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전사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런 폭력적인 방식의 경험치 단련이라면 불혹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전사에겐 무엇이 필요한가? 모름지기 무기와 갑옷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선 신상 갑옷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회사를 그만 둘 생각에 그동안 옷을 구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회사를 계속해서 다니기로 한 이상 내가 신상 옷을 안 살 이유가 없는 것. 이걸 거였다면 지난 11월 블랙프라이데이에 '미혹당하지 않기 위해서' 인내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거잖아. 이미 그 때 사이즈 품절되어 버린 건 어쩔 거냐고. 하지만 내년에도 사고 싶은 옷은 생길 것이므로 너무 연연해 하진 말자.
20fw 끝물에 간신히 품절을 면한 핫한 옷들을 잔뜩 구입했다. 어떤 건 내가 결제하자마자 품절되기도 했다. 직구 한 것도 있고 한국공홈에서 산 것도 있다. 아무튼 난 새옷 입고 출근해야 하니깐 3단계 반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