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재미있는 소설이었을텐데...찔끔찔끔 읽는 바람에 재미가 반감되어 재미 단계의 온도에 이르지 못하여 2/3 정도 읽다 포기하고 반납한 소설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소설책 1권 재미있게 읽을 시간 하나 마련하지 못하는 삶이 내가 바라던 자립한 어른의 삶인가?
그래서 나는 드라마를 몰아서 본다. 찔끔찔끔 보는 드라마는 찔끔찔끔 읽는 책보다 더더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몰아서 보면 정말 재미있다. 토일 주말동안 회차의 절반씩 몰아서 본다. 16부작이면 하루에 8화씩. 20부작이면 10화씩. 그렇게 이틀 동안 현실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가상의 세계에 몰입해서 주인공과 함께 고난을 겪고나면 스케일링 후의 입안처럼 정신도 개운해진다.
퇴원을 한 직후에는 누웠다가 혼자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수술 부위의 통증은 자주 찾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3알 이상 먹으면 안된다고 하는 진통제를 1시간마다 입 안에 털어넣고 싶었다. 혼자 힘으로 못 일어나기에 아침에 엄마가 와서 누운 나를 안아 일으켜 줄 때까지 누워 있어야만 했다. 일단 일어난 후에는 다시는 침대에 눕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울 때도 혼자 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있는 낮 동안에는 운동 삼아 집안을 어슬렁 거리면서 돌아다니거나 허리에 쿠션을 잘 받치고 쇼파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가만히 쇼파에 앉아서 TV를 보는 것 말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정말 힘들고 힘들 때 보려고 아끼고 있던 드라마 <비밀의 숲2>을 보기로 했다. 넷플릭스를 열 때마다 새 회차 업데이트 화면이 떴었는데 그걸 참고 외면하는 건 얼마나 힘들었는지...
훌륭한 드라마는 효자효녀보다 낫다. 하루 3알의 진통제와 <비밀의 숲2> 여덟 편이 나를 회복시켜 주었다. 이틀만에 비밀의 숲을 다 봤다. 그 드라마를 보는 이틀 동안은 모든 것을 망각할 수 있었다. <비밀의 숲2>을 다 본 다음 날은 약간의 공허감과 통증이 비밀의 숲 자리에 들어왔다.
조금씩 혼자 거동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쓸데없는 짓따위를 하면서 시간을 난도질하여 낭비해버렸다. 책을 좀 읽은 거 같기도 하고 영화를 몇 편 보기도 했고 산책도 했다. 산책을 하면서 깨달았다, 살면서 한 번도 이런 가을날 한가로이 단풍 구경을 하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산책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주말에는 뭘하든 월요일 출근에 대한 불편함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기에 느긋한 마음일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의사는 여러 가지 상황(코로나 상황까지도)을 고려해서 최대한으로 후유증 없이 회복할 수 있을 시간을 명시한 진단서를 작성해주었고 덕분에 나는 물리적으로 넉넉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몸은 만신창이일지라도 마음만은 평안하다. 사람들은 건강이 최고야! 라고 하지만 아파본 지금에서야 알겠다. 건강이 최고라는 말이 헛소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건강한 인간들은 대체로 그 건강한 몸뚱이로 일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일일일, 돈돈돈 할 뿐이다. 자신의 건강을 자만하면서 성실하게 자본주의의 룰을 따를 뿐이다. 그렇기에 건강하다는 것은 한 인간이 어떤 정신 상태에 놓여져 있는지, 골룸적인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지표라고도 할 수 있다.
엄마는 안 아프고 일하는 게 낫지라고 하지만 사실 나는 아파서 요양 중인 지금이 더 좋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내가 더 집중해햐 하는 것이 돈인지 시간인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골룸적인 욕망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포르쉐 살 돈은 벌지 않기로 했다. 그 돈을 포기하면 시간이 생긴다. 느긋한 마음으로 산책할 시간이, 소설의 재미에 나를 충분히 담글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나에겐 충분한 시간이 돈 보다 절실하다.
최근에 <비밀의 숲2>를 본 탓일까 어제 은행연합회장 김광수 기사를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골룸골룸. 동생 왈 "일단 행시를 합격해야 해. 이기적이고 악의적인 마음만으로는 부족해. 그게 보이스 피싱과의 차이야." 라고 했다. 세상에 비리, 살인, 치정, 마약, 섹스가 있어서 좋은 점은 그것을 소재로한 스릴러 영화, 드라마, 소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없다. 나는 넉넉한 시간을 확보한 후 범죄를 감상한다.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것 보다는 그 이야기를 감상하는 게 백 배 낫지. 마치 신처럼!!!
자립한 인간은 물리적으로 넉넉한 시간을 확보한 후 인간군상의 삶을 신처럼 내려다보는 방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