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출처를 기억할 수 없는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개성을 지닌 인물을 창작해낸 후 그 창작해 낸 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는 소설 작법. 처음에는 자기가 상황을 통제하지만 점차 인물들이 자기 특성에 따라 상황을 장악하고 그 이후의 이야기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쓰여질 텍스트는 이미 쓰여진 텍스트에 지배당한다는 당연한 이야기인데, 읽으면서는 '우와~' 했던 기억이 난다. 인물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니. 정말 멋진데. 라고.

 

외로운 이는 외로운 이를 알아본다. 고통을 겪어본 자는 남의 고통에 공명할 줄 안다. 제이가 물체의 고통을 읽을 수 있다고 했던 건. 그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겪어버린 외로움과 두번이나 버려져 배고픔과 싸워야 했던 고통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어차피 느끼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므로.

 

주인공은 제이이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아이들이 사실은 외롭고 고통스럽다. 타인을 괴롭히는 아이들도 자기 자신의 고통을 어쩌지 못하고 타인에게 전가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고민해볼 필요는 있다. 이들의 고통은 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제이처럼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인가. 아니면 어디쯤에선가 자기도 모르게 다른 중요한 무언가에 의해 밀려나버린 때부터인가. 장애인에 대해 비장애인으로서 갖는 힘 정도의 말도 안되는 수준의 권력으로도 타인을 지배하고자하는 욕구. 그렇지 않을 때의 그들이 그저 음식점 배달 수준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약한 노동자임을 생각하면 평생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권력의 단맛을 보고 싶다는 비뚤어진 욕구의 표출일 것이다. 가진 것이 많거나, 능력이 많은 이들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욕구일테지만. 

 

사실 더 위험한 것은 바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무기력이다. "이게 사람 사는 거냐?"(p.105)라고 말하면서도 바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무기력. 제이가 아이들에게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래서 제이의 '추락'은 '비상'으로 보였다. 절대 추락해버려서는 안되는 희망이었기에.

 

마지막에 이 소설이 마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듯한 작가의 장치 때문이 아니더라도, 읽는 내내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설이 '있음직한 일'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에 이처럼 충실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작가가 머리를 잡고 고개를 돌려 니가 지나쳤던 그 아이들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느낌이었다. 버려지는 아이들을. 부모가 떠난 집에 남아 자기들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낮에는 배달을 하고 밤에는 그 울분을 위험함으로 풀어내는 아이들을 한번 바라보라고. 그들이 진짜 존재하지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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