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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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순진했고, 점점 도덕심을 잃어가면서 현실을 상실했고,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여인이 있다. 김유정의 <감자>에 나오는 '복녀'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복녀'를 떠올렸다. 순진하게 버는 돈으로는 생계가 어려웠던 그녀들은 세상의 추악함을 인정했고, 그 추악함에 기대보려고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나아질 수 없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인간들은 더럽게 생활하고도 결국 성공하고 그래서 더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돈이라는 게 그렇게도 벌리는 것 같은데, 그녀들에게는 그런 기회같은 건 아예 주어지지 않았다. 계속 몰려오는 생활고라는 파도가 자꾸만 삶을 삼켜버렸다. '윤영'이 '복녀'보다 나아보이는건 자신이 옷을 벌어 버는 돈으로부터 좀 더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늘 '환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희망. 그 신기루를 윤영은 늘 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일상이 그녀에게는 '환영'같은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간 것 같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대신 어서오시라며 '환영'하게 되버린 건 짐처럼 느껴지는 가족들과 빚이다.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민영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간 것도. 그나마 믿음직하게 보였던 준영이 그렇게 뒷통수를 치며 도망간 것도. 공무원이 될 줄 알았던 남편이 무능했고, 그저 무능한 것으로도 모자라 잘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것도. 앉은뱅이가 될 지 모르는 딸도.
 
소설 속에서 윤영에게 그나마 가장 행복했을 때는 전세집으로 이사할 때였다. 하루 휴가도 내지 못하고 식구가 겨우겨우 땀을 빼가며 계단을 올라 이삿짐을 나르던 그 때말이다. 객관적으로 절대 '좋아졌다'고 말 할 수 없는 순간이다. 그런데도 그나마 그 순간이 정점이었던 것처럼 툭. 하고 그녀는 떨어져내린다.

마지막 문장인 이제 다시 시작이다. 라는 말은 그래서 어이없게도 희망적이지않다. 왕백숙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전보다 더 비참해진 채로. 그건 희망적인 다시 시작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에게 희망이었던 것이 있을까.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상상하는 것이 그나마 '희망'이었던 그녀에게 이제 다시 '환영'의 시간이 시작되어 버린 것 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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