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퀴즈쇼 - 2판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사생아가 있다. 사생아인 자신의 이야기를 눈물 한 방울 없이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재미있게' 하는. 자신의 출생과 주변에 쿨한 척 하면서 막상 할머니의 죽음 뒤에 인생과 함께 남겨져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남자. 어지간한 질문에는 대개 대답할 수 있는 잡학 다식한 남자. 그러나 미래에 대한 아무런 청사진이 없는 남자. 이 젊다는 것 밖에는 없는 남자가 앞에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무어라 말할까.
'괜찮음'
그는 늘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괜찮음'은 진정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행복한 순간에도 가장 불행한 상황을 떠올릴만큼 '불안'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의 '괜찮음'은 예상했던 최악의 경우를 만나 그 '불안'이 해소된 '괜찮음'이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면서 괜찮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불행이 예상한 것이라고 해서 덜 불행하던가. 게다가 그의 이러한 생각은 불행앞에서 치열해져야 하는 그의 정신을 어느정도 느슨하게 만든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가 최소한을 지키고 살아가면서도 더이상 치열해 지지 못하도록 잡아두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
현실에서 그는 무능력하다. 치매걸리기 직전의 노인인 곰보빵 할아버지에게서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집'을 지켜내지 못한다. 대학원까지 다녔지만 눈까지 보이지 않는 노인에게 오래된데다 상식밖의 이자까지 물어야 하는 채무관계에 대해 그럴듯한 반박조차 하지 못한다. 집에서 나온 그가 살아가기 위해 들어간 편의점에서는 모르는 남녀에게 돈을 빌려주고 해고된다. 삶으로 떠밀려 나온 그는 그야말로 익사하기 직전이다. 그가 온실속에서 할머니가 빌린 돈으로 학업에 열중하는 동안 사람들은 치열하게 자기 삶을 꾸려왔던 것이다. 헤어진 여자친구 앞에서 장황하게 '놀고 먹을 것'을 늘어놓고, 고시원의 쪽방에 살면서 옆방녀에게 '빈민 구호 활동'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정도의 현실감각으로 대체 그는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것일까.
'벽 속'
현실의 창 대신 인터넷 창을 선택한 그는 '벽 속'에 살고 있다. 창 하나 없는 사방의 '벽 속'에서, 또 인터넷 창이라는 가상의 '벽 속'에서. '벽 속'에서의 그는 현실에서보다 유능하다. 옆방녀에게는 매우 똑똑하고 의지가 되는 남자로 비춰질만큼. 퀴즈방에서의 그 역시 유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답을 헤매고 있을 때 적당한 때를 보아 정답을 내놓을 수 있을만큼. 그러나 옆방녀의 죽음으로 그의 벽은 현실에 파묻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더 단단한 '벽 속'으로 들어간다. 사방이 막힌 네모난 건물 안. 바로 '회사'다. 현실과는 완전히 차단된 곳. 그래서 그 곳에 있는 동안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곳. 현실을 살아가는 뇌가 오히려 쓸 데 없는 곳.
'삶'
유리는 그에게 존재에 대해 질문한다. 너는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라고. 이 근원적인 질문에 그 역시 흔들린다. 장황한 유리의 설명과 달리 '존재'는 그의 몇번의 발 쿵쾅거림으로 증명된다. 이제 그는 선택해야 한다. '뇌'가 아닌 '육체'를 위해 그 많은 노력을 하며 살 필요가 없는 그 곳에서 '뇌'만 가진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육체가 함께 생동하는 세상으로 돌아올 것인지. 유리가 칼을 든 순간 그의 머릿속에 설정한 가정은 아마 그것인지 모른다. 그가 유리처럼 그곳에 동화되었더라면 어쩌면 묵묵히 칼을 받았을지 모르니까. 그는 가끔 퀴즈쇼가 벌어지던 '벽 속'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를 그곳으로 안내한 이춘성을 찾아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면서 그는 점점 삶을 배워가게 될 것이다.
그의 세대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고 자랐다. 그 결과 공부만 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아지고, 그래서 공부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몰랐다. 생활을 해결하는 데에는 노인보다 어리석고, 이익을 찾는 데에는 도둑보다 미련하다. 장래 희망이란 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무언가 하나를 잘 하라고 했지만 잘하는 것이 생업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가정은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 아니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30대가 되어서도 부모의 그늘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세대들. 대학에 가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기 위해 거기에 가 있는지 몰랐던 사람들. 그래서 어느 덧 삶에 내던져진 세대들. 그런 그들의 아픔과 혼란스러움이 그를 대표해 이 소설에 녹아 역시나 그 세대였던 나의 마음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