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민음사 모던 클래식 5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키친

p.8
 
며칠 전, 할머니가 죽었다. 깜짝 놀랐다.

확실하게 존재하였던 가족이란 것이, 세월을 두고 한 명 두 명 줄어들어, 지금은 나 혼자라 생각하니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보였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태어나고 자란 방에 나 혼자 있다니, 놀랍다.

무슨 SF같다. 우주의 어둠이다.

 

 



달빛 그림자

p.153
  손을 흔들어주어서, 고마워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흔들어준 손, 고마워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현실과의 분리를 가져온다.

 

갑자기 현실에서 이탈하는 느낌.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고, 볼 수 없다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고. 그래서 현실이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우주에 떨어진 느낌.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 어쩌면 환상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미카게는 할머니를 잃고 부엌에서 잠을 잔다. 그녀에게는 점점 편안한 곳으로 이동했을 뿐이라는 설명으로 족한지 모르지만, 할머니가 있었던 시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녀의 상처가 그녀를 그곳으로 몰아넣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런 미카게에게 유이치가 전화를 해서 같이 살자고 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간다. 실은 아버지이지만 어머니로 살고 있는 에리코씨와 때로 무심한 듯 따뜻한 듯 한 유이치와 함께 살아가면서. 이 두사람 역시 유이치의 친어머니를 잃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일까. 유이치와 미카게는 함께 꿈을 꾸고, 이 꿈을 통해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힘을 얻는다.

 

달빛 그림자에서도 환상의 힘은 계속된다. 사랑하는 연인 히토시를 잃은 사츠키는 의문의 여인 우라라를 통해 히토시를 다시 만나는 환상을 체험한다. 그의 마지막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기에 사츠키는 자신에게 생긴 상처가 상처라는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아니 그것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갖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 히토시의 손짓은 이제 스스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여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주게 된다.

 

그러나 환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 준 것은 환상만이 아니다. 꿈을 꾸거나 시간의 흐름이 역행하는 등의 신기한 현상은 우리에게 안정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된다. 미카게의 곁에 있어 주었던 유이치와 에리코씨가. 에리코씨의 죽음 뒤에 어둠 속으로 파묻혀버렸던 유이치에게는 다시 미카게가. 각각의 연인을 잃은 사츠키와 히라기에게는 서로가 있어주었다. 상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그 상처에 갑작스럽게 손을 대기보다는 살살 바람을 불어 상처가 마르기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상처가 마르고나면 딱지가 앉고, 딱지 속에서 서서히 새 살이 차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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