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호손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
나사니엘 호손 지음, 천승걸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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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자>로 잘 알려진 작가 나사니엘 호손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단편집이다. 단편은 사건이 단일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장편보다 속도감이 있는 데다가 글의 의도 역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머리를 식히면서 읽기에 좋다. 나사니엘 호손 정도의 필력이 더해지면 그 속도는 더욱 빨라져서 책장이 그야말로 휙휙 넘어가게 해준달까. ^^


장난같은 삶. 또는 처벌같은 삶

<웨이크필드>에 등장한 웨이크필드씨는 어느날 아내에게는 여행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와 옆 거리에 머물면서 아내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자신이 없는 동안 아내는 어떻게 지낼지 궁금해서 그랬다고 하기에 20년은 긴 세월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단지 하루하루 미뤄왔을 뿐 20년을 기약한적도 결심한적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는 것이 삶이다. 한편 <메리 마운트의 오월제 기둥>에 등장하는 두 젊은 남녀는 결혼과 동시에 향락의 도시 메리 마운트를 떠나 청교도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오월의 왕과 왕비였던 순간이 끝나고 다시는 그토록 화려한 순간을 맞이하지 못하게 될 이 두 남녀의 삶은 그들에게 충분한 처벌이 되지 않겠는가. <로저 맬빈의 매장>의 주인공 로이벤의 삶 역시 처벌에 가깝다. 자신을 아버지처럼 돌봐주었더 로저 맬빈을 죽음 근처에 버려두고 왔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의 딸과 결혼하면서 그를 제대로 매장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은데 대한 죄책감으로 그는 평생을 어둡게 살게된다. 그리고 결국 로저 맬빈의 매장은 그의 아들의 시체와 그 위에 엎드러진 아내의 눈물로 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삶의 비참한 결과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인간본성에는 죄가 있다.

<목사의 검은 베일>에서 후퍼 목사는 어느날부터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물론이고 독자들이 기이하게 여길만큼 이 검은 베일은 단순한 두장의 천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것은 목사의 종교적인 능력을 높이고 인간적인 능력은 없애버렸다. 사랑하거나 위로받는 대상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용서받는 대상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후퍼 목사는 죽어가면서 말한다. 그대들! 그대들의 얼굴에도 검은 베일이 씌워져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이 메세지는 <젊은 굿맨 브라운>과 <이선 브랜드>에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브라운은 열심한 신도들이라고 생각했던 인물들을 이단의 의식에서 만난다.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호하게 구성되어있지만 어느쪽이든 브라운은 죄에 대한 고뇌로 일생을 어둡게 살게 된다. 이선브랜드 역시 용서받지못할 죄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돌아온다. 그것이 비단 그의 안에만 있던가. 그것은 우리 개개인 안에 그 심장 안에 있다.

아름다움. 그 허무함.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는 미와 허무함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를 잘 보여준다. 오웬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노력을 쏟아부어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그리고 더 아름다운 나비를 만들어 낸다. 고도의 섬세하고도 섬세한 그 작업은 그의 예민한 감각뿐 아니라 그의 정신의 정수까지도 쏟아부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작품은 그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단지 놀라운 '장난감'에 불과했다. 한순간 힘을 쏟아부어 만들어내는 대장장이의 작품보다 실용적이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사실에 대해 억울해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으나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애니의 아들이 손쉽게 나비를 부숴뜨렸을 때 보이는 태도는 그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그리고 진정한 예술에 대해서 초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예술가는 어쩌면 허무함을 견뎌나아가야 하는 작업일지 모른다. 이같은 아름다움과 허무함은 <야망이 큰 손님>과, <라파치니의 딸>에게서도 나타난다. 더없이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에 손님으로 찾아온 야망 가득한 젊은이는, 이 소박한 가정 모두에게 각각 자신만의 야망을 꺼내놓도록 독려한다. 그러나 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한순간의 산사태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인간이 스스로 상상하는 미래의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가. 라파치니의 딸 역시 그 아버지의 과학적 지식과 야망을 모두 쏟아부은 치명적이나 아름다운 '독'이었다. 그녀뿐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게 된 구아스콘티까지 독으로 만들어 버리는 중독성까지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은 해독제에 의한 허무한 죽음이었다. <반점>에서도 아내를 완벽하게 아름답게 만들고자했던 남편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아름다움은 영원할 수 없다는 숙명. 그것이 그토록 허무한 종말에 이르도록 하는 어쩔 수 없는 약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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