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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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단순한 농담에서 시작되었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 p.51

 

이 말은 루드빅의 진심이었을까.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는 마르게타가 연수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자신의 부재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느꼈고. 그에 대해 질투했다. 그녀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옹호하는, 그녀에게 주입되고 있는 정신에 찬동하지만 그녀의 즐거움에는 분노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충격을 주는 엽서를 보내고 싶었다. 그것이 전부였던 루드빅에게 공산당원들은 검은표지를 붙인 채 광산노동을 할 것으로 지시한다. 이제 그는 공산당원이 아닐 뿐더러 그가 그 전의 인생에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길 위에 놓이게 된다.

 

사실 대개의 청춘들은 자신의 외적, 또는 내적인 준비상태와 별 관계 없이 어느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자신이 거부했던 길에 놓인 루드빅처럼. 남자친구를 탄광에 가게 만들어버린 마르게타나, 젊은 나이에 중대장의 짐을 져야 했던 어린 중대장이나 어떤 이유로든 아버지를 부정해야 했던 알렉세이. 이들 모두 역사 속에 던져진 청춘들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그 역사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찾아 수행했고, 누군가는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했으며, 또 누군가는 버려져 역사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었다.

 

루드빅은 자신이 그토록 추앙했던 공산주의에서 추방되었고, 추방된 이후에는 그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은근히 자신의 편에 서 주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당시 차기 조직 위원장이었던 파벨 제마넥의 아내 헬레나를 우연히 만나게 되자 그간 쌓아왔던 분노와 보복의 기운이 한꺼번에 일어나기 시작한다. 헬레나를 정복하여 그의 남편 제마넥을 욕보이자는 계산은 분명 처음부터 실행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점점 그의 안에서 구체적으로 자라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를 실행에 옮기려는 장소가 하필 그의 고향인데다가 거기서 그가 정복하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여인 루치에를 만나고, 거기다가 헬레나가 제마넥에게 그렇게 소중한 아내는 아니라는 사실까지를 알게 되어 그녀에 대한 관심마저 사라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더욱이 제마넥은 그가 부러워 마지않는 젊은 애인을 대동하고 나타나 그가 전에 알던 그의 모습인 채로 그러나 그가 알던 그의 정신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교수가 되어있다. 루드빅이 15년간이나 품고 살아왔던 분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토록 분노하고 부당하다고 외쳐왔지만 결국 그가 제마넥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작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그러나 그것도 이미 그의 아내에게 저지른 부정때문에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린 이 시점에서? 게다가 루드빅은 제마넥이 현재 자신의 생각과 상당히 유사한 생각을 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는 그의 반대편에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무엇을 그의 혁명으로 삼을 것인가.

 

헬레나의 자살소동은 그야말로 기막히게 서글픈 농담이다. 그녀가 자신에게 딱 알맞은 상대라고 느꼈던 루드빅이 사실은 자신의 남편 때문에 일부러 접근해 그녀의 육체를 가진 것인데다 (그녀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더 서글프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 그녀에 대한 눈꼽만큼의 애정도 없어졌고, 그 통보를 받은 후 그녀가 겪은 마음의 고통을 생각해보라. 그런 상태에서 진지하게 썼던 편지와 죽음마저 불사하려는 결심으로 먹은 한 알 한 알의 진통제들이 그녀의 목을 넘어갈 때의 진지함까지. 그런데 그녀가 먹은 약이 진통제가 아니라 변비약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그 비극적이어야 할 장면에서 자기를 버린 남자이며 그토록 잡고 싶어했던 남자 앞에서 팬티를 내린 채로 변기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여버린데다, 그 상태로 그에게 붙잡혀 ‘더러운 자식!’이라고 소리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외침이 얼마나 그럴싸한지.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이 절묘한 농담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지는 것이다.

 

“나는 문득 내가 당에서 축출당했던 그 사건을 불가피하게 그녀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그것이 아득히 멀고 너무도 문학적인 이야기로만 비추어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 시간의 물결, 그것은 루이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시대들 사이의 차이들마저 다 씻어가 버리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쉽게 씻어가겠는가.”p.378

 

제마넥은 마르크스 - 레닌주의를 가르치면서 자신은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혁명이 아니다.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다른 여러 생각들과 공유되는. 이제 그들의 혁명은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루드빅이 말했듯이 이제 젊은 세대는 루드빅과 제마넥이 대단한 차이를 가진 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야로슬라브가 그의 아들에게 <왕들의 기마행렬>에서 왕 역할을 시킬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역시 브로조바 양에게 왜 자신이 제마넥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상태인지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잊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애써 외면했던 야로슬로브를 루드빅이 찾아가고. 그렇게 함께 연주를 하면서 그가 야로슬로브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친구라고 여기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 둘은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묘하게 같은 고집을 갖고 있었다. 역사는 잊혀지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 자신이 지키고자 생각한 것들이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 그리고 이제야 자신들은 잊혀지는 역사의 한 켠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사랑역시 잊혀져간다. 한때는 모든 것을 걸만큼 사랑했던 여인 (물론 다양한 상황들이 뒷받침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루치에를. 그녀를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보지 못한 그녀의 나체를 하나하나 열거할 수 있을 정도로 상상했던 그녀를 어떻게 그리 잊을 수 있을까. 한때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넘겨줄 정도로 사랑했던 헬레나를. 그 징표와 함께 깡그리 잊고 손쉽게 헤어지는 일이 어떻게 제마넥에게 가능했을까. 한때는 함께 민속의식으로 결혼하는 일에 완벽한 행복을 느꼈던 야로슬라브의 아내 블라스타는 어떻게 그렇게도 잔인하게 모든 민속적인 것을 그의 남편앞에서 부정할 수 있었을까. 단순하다. 사랑도 잊혀지는 것이기에. 그리고 잊혀지기 때문에 또 새로운 사랑을 할 것이기에. 그리고 새로운 사랑 역시 잊혀질 것이기에.

 

사랑도 역사도 이렇게 흘러간다. 잊혀지고 또 새롭게 시작되고. 그리고 잊혀질 것이다. 마치 한 마디의 농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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