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의 고독은 한 가문의 숙명적인 고독의 반복이었나보다. 가장 오랜 기간 자손들을 지켜 본 우르술라가 말했던 것처럼 삶이 돌고 도는 가운데 끊임없이 괴롭게 했던 고독의 숙명. 우르술라에게서 시작된 부엔디아가 사람들의 번영은 여왕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었던 여인 페르난다가 들어오면서부터 축소되어가기 시작했다. 활짝 열렸던 문이 닫히고 사람들을 들이는 일을 싫어하는. 우르술라는 자신의 자녀 외에도 미심쩍에 그녀의 가족에 끼어들게 된 레베까를 받아들였고, 원하지는 않았지만 태어난 이상 손자들을 책임졌으며. 자신의 방식대로긴 했지만 그들을 사랑해주었다. 반면 페르난다는 자녀 외에 받아들여야했던 아이 아우레리아노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었고. 그를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방책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녀 역시 세 아이를 출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은 점점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 마지막 아이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우르술라가 처음부터 걱정했던대로 돼지꼬리아이가 태어난다. 백년 후에 마치 그녀의 삶이 끝난 다음에도 여전히 그녀의 공포가 계속 피속에 이어져 내려온 것처럼. 그러나 정작 돼지꼬리 아이를 생산한 아마란따 우르술라는 전혀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우르술라의 두려움 외에도 아우렐리아노의 영웅적 인내심을 물려받은 탓일까.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과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이 가진 운명은 달랐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이 하나는 겉으로 보이는 고독에. 하나는 시끌벅적한 가운데의 고독에 시달렸던 것은 아닐까. 그 고독을 벗어날 방법을 하나는 내부에 하나는 외부에서 찾은 것뿐. 그래서 세군도 형제라는 쌍둥이가 태어나 각각 달라보이는 삶을 살았지만. 같은 고독속에서 죽음을 맞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은 신화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래서 한 번 읽고 이 작품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고,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상징을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내가 마치 어떤 다른 공간에 속해있는 미지의 인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엿보면서 혹여 현실에서도 가능한 일들은 아닐지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마꼰도라는 땅을 그려보게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