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을 때에는 주의해야 한다. 독자에게 주인공처럼 느낄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주인공의 모습에서 독자가 멀어져 버리거나 그와 같은 감정을 유지하지 못하면 긴박함은 떨어지고 이야기는 모호해져 버린다. 내가 그인것처럼 서술자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읽으면 이 이야기의 공간과 숨막힐 듯 아름다운 아우라의 모습, 또 늙은 콘수엘로 부인의 주름진 얼굴표정이 눈 앞에 그려지게 될 것이다. 이인칭 소설의 강점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주인공과의 동일시 이야기 속에 내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현실감.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다루는 데도 마치 현실에 있는 일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너라고 지시하고 있는 소설의 시점 때문인 것이다. 작가인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말미에 딸려있는 글에서 자신의 주인공 펠리페 몬테로를 가짜 주인공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진짜 주인공은 그가 동일시하게 되는 요렌테 장군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너라고 불리는 우리들 모두를 말하는 것일까. 아무튼 그 주인공 펠리페는 역사학도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조건과 매우 일치하는 조건을 가진 역사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콘수엘로 부인의 집으로 찾아들어간다. 4000페소라는 거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기회지만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 아우라에 이끌려 그 집에서만 작업을 해야 한다는 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그 곳에서 콘수엘로 부인의 남편이었던 요렌테 장군의 비망록을 편집하고 마무리 하여 출판하는 일을 맡게 된다. 존재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불명확한 장소. 콘수엘로 부인은 가끔 식사시간에 자리를 비우고, 때로는 신체의 일부분만 희미하게 보인다. 아우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인이라는 사람이 있지만 그 역시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점점 펠리페 역시 자신의 신체를 자기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면도를 하면서 자신이라도 스스로를 통제해야 한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가능한 사람은 그런 결심을 할 필요도 없다. 그는 아우라가 늙은 콘수엘로 부인에게 사로잡혀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빼내고자 하지만 점차로 아우라와 콘수엘로 부인은 동일시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요렌테 장군의 모습과 동일시 된 자신을 발견한다. 아우라는 콘수엘로 부인의 욕망이다. 그녀가 끝까지 지키고 싶어한 그녀의 젊음. 이 둘의 존재가 같은 것이라는 점은 이들 둘의 행동에서 드러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동을 하고, 때로는 다른 장소에서 같은 행동을 하기까지 일치하는 그들의 행동. 젊음과 늙음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둘은 행동 뿐 아니라 심정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그녀 둘을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단지 그녀가 환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요렌테 장군을 따라가는 펠리페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요렌테 장군의 비망록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가 아우라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그는 장군의 역사적 기록보다 개인적 기록. 즉 콘수엘로 부인에 대한 기록에 집착한다. 그리고 아우라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요렌테 장군이 콘수엘로 부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늙더라도, 죽더라도 사랑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진 속에서 요렌테 장군이 아닌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비망록을 마무리하는 일은 그의 몫이다. 비망록의 뒷 부분은 그에 의해 채워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