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나사는 두 번 언급된다. 첫번째는 더글러스의 본격적인 이야기기 시작되기 전에 크리스마스 전날밤 들을 만한 무서운 이야기에서 아이의 존재가 공포를 더욱 조이는 나사가 된다면, 아이 둘이라면 그 나사가 두번 돌려지는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일 거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또 하나의 나사는 22장 에서 마일스와 둘이 남기로 결심하고 그를 식사시간에 만나기 전에 그녀가 마음을 다잡으며 소박한 인간 덕목의 나사를 다시 한 번 죄기로 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그녀는 이렇게 나사가 조여진 채로 마일스와 마지막 대면을 하게 된다. 유령의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 소설은 두가지 방향으로 읽히게 된다. 매우 핸섬하지만 독특한 성격의 주인인 남자로부터 한 가정의 모든 권력을 위임받은 젊고 노련한 가정교사의 횡포로 읽히느냐, 아니면 낯선 곳에서 모든 책임을 떠 안게 된 젊은 가정교사가 사랑스러운 두 아이를 위해 기꺼이 자기의 모든 용기와 힘을 쥐어짜는 희생으로 읽히느냐이다. 마치 나사를 조이느냐 푸느냐를 놓고 조이는 경우와 푸는 경우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독자들은 이 두가지 방향을 놓고 고민하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제법 그럴듯한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 초반에는 가정교사의 서술에 신뢰를 갖지만 그녀가 점점 정신력을 잃어가고 냉정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녀의 말이 옳다는 몇가지 증거를 대면하면서도 그녀의 서술에 의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그녀 때문에 플로라는 병에 걸려 환자인 상태로 삼촌을 향해 떠나갔고. 마일스는. 아마도(소설 전체가 모호하게 서술되었기 때문에 이 서술도 명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가 이 두 남매를 지켜냈느냐를 고려해 본다면 그렇지 못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을 소유하려는 욕구는 유령이라고 불리는 퀸트와 제셀양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그녀는 아이들을 '내 아이들'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마일스가 자기의 '소유'가 되었다고 외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녀가 킨트와 제셀양의 모습을 본 적이 없음에도 유령이 된 그들의 모습을 명확하게 묘사했다는 증거는 그 앞에서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아이들의 깜찍하지만 순진하고 어찌보면 공포스러울 정도로 태연한 행동들도 가정교사의 서술을 모두 제하고 나면 그녀가 보여준 소유욕에 대한 반항심일 수 있으리라는 독자들에게 밝혀지지 않은 그 아이들의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삼촌의 성격상 그들이 삼촌에게 위험을 알리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촌을 블라이로 불러들이려는 생각이 가정교사보다 아이들에게 보다 절박하게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끝장까지 읽고나서도 여전히 나사를 어느 쪽으로 조여야 하는 것인지 확신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더글러스가 앞서 밝혔던 것처럼 가정교사의 광기로 보든, 아이들과 유령의 섬짓한 결탁으로 보든 이 서사가 공포스럽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