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지하에 들어갈 때 가끔 섬뜩하게도 죽음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는지. 아니 섬뜩하게 죽음까지 아니더라도 지하에 있으면서 지상에서의 시간을 잊어버리고 지내본 적이 있는지. 어떤 경우든 사람들에게 지하란,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을 벗어난 어떤 공간이다. 집을 산다면 지하를 피하고 지상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은 사람들의 생활을 영위하는 곳으로서는 지하가 여러 방면으로 마땅치 않은 곳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 지하에서 20년 동안 살아온 남자가 있다. 이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어느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왜소한 몸집에 얼굴도 잘 생겼다고 할 수 없는데,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남을 보는 데에 열중해 있다. 자기의 행동이 얼마나 불안정해 보이는지 그는 알까. 자기 안의 자아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중이다. 그리고 때로 남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문득 냉소를 지어보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직접 눈을 마주 대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그는. 자기 안의 의식은 과하고, 자기 밖의 자존감은 초라한. 자의식 과잉의 인간이다. 진눈깨비. 진눈깨비와 함께 그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과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수기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고 소설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상에서도 그의 자의식은 지나치리만큼 과하다. 그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부분을 모두 제외하고 그의 움직임을 주시해보면 그는 그야말로 꼴불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민폐덩어리. 불쌍한 패배자. 그가 증오해 마지않지만 실제로는 그를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아주는 주변 사람들이 대견할 뿐이다. 그런데 그는 말한다. 자신은 단지 모두가 끝까지 갈 수 없었던 데까지 자기를 밀고갔을 뿐이라고. 그런가. 과연 그러한가. 우리들 어쩌면 그처럼 초라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때로 조그마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해버리고 마는 인간들인 것일까. 그가 지하에서 써 내려가는 이 이야기가 그저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이유는 진지한 이 물음에 있다. 우리들 때로는 이렇게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오롯이 감정적인 민폐를 끼치던 적이. 과연 없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