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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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봐야지 라고 쭈욱 생각했던 작품이었다.

주변에서는 내가 당근 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일본 소설은 내 취향이 정말 아니다. 싫다거나 재미없다거나 그런 것 보다는 그야말로 읽는 '취향'의 문제다.

 

아무튼

이 소설은 원래 단편으로 쓰고자 했던 <반딧불이>가 장편화 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를만큼 장편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매끄럽게 처리되어있다. 바느질 잘 하는 퀼터의 작품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ㅎㅎ

가와무라 미나토씨는 이 소설의 제목 노르웨이의 숲에서 숲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인물들의 삼각관계에 대해 고찰했는데, 매우 흥미로운 해석이었다. 1:1의 단독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설에서는 삼각관계를 소재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걸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지만.

 

이 작품을 이어가는 삼각 관계는 매우 다양하다. 처음에는 기즈키-와타나베-나오코 에서 시작하여 나오코-와타나베-미도리 , 나가사와-와타나베-하쓰미, 나오코-와타나베-레이코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을 둘러 싼 관계는 둘 만 대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셋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여러가지 관계는 차치하고 작품의 두드러진 삼각관계만 보자면, 나오코-와타나베-미도리 라고 할 수 있는데, 나오코는 기즈키와, 미도리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떤 남성과 연애를 한 경력이 있다. 나오코는 심약하고 죽음을 껴안고 살아간다. 반면에 미도리는 주변을 돌보며 삶을 상상한다. 그래서 나오코는 죽음의 느낌을 미도리는 삶의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죽음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즈키의 죽음을 경험한 후 부터 생긴 것이지만 그 때문에 그는 삶을 살면서도 죽음에 가까이 있음을 상기하고 있다. 죽음을 늘 상기하는 사람에게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개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도리의 응석을 늘 받아주는 입장에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오코에게만 온 마음이 가 있는 것도 그때문이다. 우리가 청년일 때에 경험하는 그것. 삶에 대한 허무함. 노곤함. 그것이 모두 응집되어있는 그녀. 나오코가 그의 열병의 대상인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결국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선택한다. 그리고 곧 나오코는 죽는다. 삶을 긍정하고 생동감있는 삶에 마음을 둘 때 죽음은 함께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언젠가 곧 죽는다고 하더라도 삶은 늘 긍정적인 것이며 그것과 함께 살아가고자 할 때에는 염두에 두지 않게 되는 것처럼.

 

예기치 않은 기회를 맞아 장장 4시간에 걸쳐 탐독하게 된 상실의 시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더 쓰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나중에 또 써 봐야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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