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은선 지음 / 예담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여행을 결심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한다. 새로운 나를 찾아 돌아오겠어. 혹은 지금의 나를 바꾸고 싶어. 그것이 계획되어있는 것이었든, 아니었든지간에 여행이라는 것이 우리의 '표지'를 벗겨주는 것만은 사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를 가려왔던 것. 내 본질.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내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리라, 혹은 내 거짓된 모습을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진실이다.

책의 표지를 벗기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담겨져 있는 가득한 사진들이 펼쳐졌다. 그 안에 세상이 있었다. 여기가 네 명의 남녀가 버리고자 했던, 그리고 찾고자 했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학창시절에 그런 경험이 있다. 그림에 별로 소질이 없었던 나는 내 그림을 시간내에 완성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늘 집에까지 그 그림들을 가져와서 그림을 완성해야만했는데, 그려놓고 나면 비교대상이 없어 늘 혼자 내 기준에 그림을 평가했다. 어느날은 그정도면 아주 잘 그린 그림 같았고, 어느 날은 형편없어서 도저히 점수를 받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가면 다른 아이들의 그림과 비교해가면서 내 그림의 위치를 잡아갈 수 있었다. 늘 그렇게 대단하지도, 그렇게 별볼일 없지도 않았다. 늘. 노력한 만큼. 그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이들의 삶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만 바라보던 이들이 '남'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의 삶의 궤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나작가가 그토록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기며 모든 이들의 삶에서 등을 돌렸을 때에는 전혀 보아지 않았던 진실이. 원포토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ok김 역시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로사의 불행을 직면하면서 드디어 사랑의 본질을 찾아가기 시작했던 것처럼. 또 박벤처가 자기의 희생만을 생각하다가 아내의 기다림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처럼.
"기억은 사랑을 확인하는 인증서와 같다. ...... 사랑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창고 속으로 깊숙이 저장된 채 언제든 필요할 때 현실 속으로 호출된다. "
사랑을 확인하는 것. 원포토에게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늘 우울을 동반했다. 그에게 사랑과 이별은 정 반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별 후에도 사랑한 기억은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스크린에 비친 그녀의 한결같은 그 말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이별은 사랑했던 추억을 선물로 남겨준다. 그것은 오래될수록 아름다와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별이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리고 사랑했던 기억도 모두 망가뜨려버린다면 우리는 절대로 결과가 아름답지 않은 사랑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행을 떠나온 이들에게만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 있던 그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그녀에게도 드라마가 있었다. 사랑했던 남편이 있었고, 아이가 있었고, 그리고 알콩달콩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녀가 늘 그렇게도 피워대던 담배는 그녀의 추억 저장 창고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늘 추억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도 현실적이면서 그렇게도 낭만적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모든 드라마와 내 삶의 드라마들을 새롭게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었다. 영화와 소설의 중간쯤이라고 해야할까. 여행기와 이야기의 중간쯤이라고 해야할까. 소설 속 인물들이 보는 듣는 아르헨티나의 모든 것들이 실물로 등장하고 그들이 함께 그 장면에 멈춰 이야기를 건넬 때 나는 함께 여행을 떠나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전혀 얼굴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등장을 상상해 볼 수도 있었다. 이 책을 들고 아르헨티나로 떠나본다면 어떨까. 그러면 아마도 네 사람과 함께 여행을 떠난듯한 기분에 빠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