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진화 - 2010 제17회 김준성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62
이근화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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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우리들...
단순히 나의 의견을 이야기를 할 때도 '우리는~'이라며 시작하는 집단적 주체성의 정서...
그래서 근화, 그녀의 진화는 우리들의 진화가 되었고, 나도 그녀와 함께 진화하는 독자가 되고프다. 그녀와 감정을 공유하는 시로 '소울메이트'는 어떨까?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고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
비의 기억을 되돌려 주기 위해
흠뻑 젖을 때까지
흰 장르가 될 때까지
비의 감정을 배운다

(10쪽 - 소울 메이트 도입부)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는다는 것 그 자체가 꽤나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유행에 민감한 제목에 혹해서 이 시를 읽을 이들도 있겠으나 시어 하나하나가 너무 좋다.
지상으로 도달한 이후로 더 이상 비가 아닌 비의 기억에 대해 공감해 주는 것도 우리 몫이다.
장르이되 장르가 아닐 '흰 장르'의 감정을 배우는 우리는 누구일까?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발을 사랑해

(16쪽 - 우리들의 진화 도입부)

시집의 제목이 된 '우리들의 진화'는 도입부가 그냥 은근히 머리 속에 맴돈다. 그냥 좋다.


우리가 가족이라고 해서 감정을 통일시킬 필요는 없겠지요 당신에게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지구의 영 점 영영팔삼 퍼센트의 물속에 포함됩니다

눈을 뭉치듯 구름을 뭉치는 당신을 위해
당신의 가슴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열 개의 손가락을 위해

사 곱하기 사
십육 곱하기 십육
엄지로 못을 박고 검지로 머리카락을 집어 올립니다

당신이 건져 올리는 감정에 우리는 서서히 빠져듭니다 조금 늙는다면 코가 영 점 오 센티미터 정도 길어지겠지요 우리는 풍요로운 냄새를 피울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 일 플러스 일을 중얼거리며
오늘은 평범하게 걸어다닙니다
자세히 안 보면 안 보이지만 내가
당신의 가족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둘이 빛줄기처럼 쏟아지고
우리는 그것을 피로도 황금으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웃다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릎을 깨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내가 발 담그는 물은 영 점 영영팔삼 퍼센트의 물 속에 속하고 이 지구 위를 돕니다

감상적인 젤리피쉬의 헤엄은
감상적인 바다 속에서 내가
당신의 가족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46쪽 - '내가 당신의 가족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전문)

근화 시인은 축시를 선사하지 않으면 결혼도 물릴 수 있다는 한 친구의 애교스런 협박에 바로 이 시를 들고 결혼식 축시를 읽었다고 했다. 내용이 어찌하든 제목만으로 충분했다. 시인을 친구로 둔 그 친구가 이 축시로 인해 더욱 더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우리는(?) 기원할 것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갔다
프랑크푸르트에는 f가 두 개나 들어가서
발음할 때마다 불편하다
두 개의 f를 발음 하다가
다섯 시 오십오 분을 놓칠 수도 있다

루프트한자를 타고 갔을까
하나의 f를 매달고 한 번의 화장실
두 번의 식사 세 번의 기지개를 켜고
신문을 꼼꼼히 읽고
창밖의 구름으로 아무것도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적금을 적립식 펀드로 바꾸라고
은행 직원이 전화를 했다
펀드의 f는 불안하다
네 시 반까지 은행시간도 불편하다
보도블록 같은 f

아파트 난간에 서서
날아가는 빨래를 본다
f같이 서서 죽은 새들을 향해
손을 뻗어 본다
새 같지만 f같은 마음에 도달한다

(68쪽 - 'f'의 전문)


멋지다!
굳이 마지막의 상형문자적 새의 죽음까지는 아니라도... 'f'라는 알파벳 하나로 고민하는 시인의 모습에 차분한 비판이 읽혀졌다. 세번째 시집에서는 26개의 시가 새롭게 써지기를 기대해 볼만 한 것 같다.
그리고, 시가 말한 4시30분은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 은행의 영업 종결 시간이 되지 못한다.
은행 영업시간이 올해 봄부터 30분씩 앞당겨져서 이제는 9시에 열어서 4시에 문을 닫으니, 이 시는 하나의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게 하는 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냥 신선했다.

나의 기분은 등 뒤에서 잔다
나의 기분은 머리카락에 감긴다
소리내어 읽으면 정말 알 것 같다
청바지를 입는 것은 기분이 좋다

얼마간 뻑뻑하고 더러워도 모르겠고
마구 파래지는 것 같다
감정적으로 구겨지지만
나는 그것이 내 기분과 같아서
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

(101쪽 - '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 뒷 부분)


매우 여성적인 시인...
지난 금요일 홍대 앞 북카페 '살롱 드 팩토리'에서 '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을 낭송하던 그녀의 평온한 모습과 차분했던 목소리가 기억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의 시는 그녀의 목소리처럼 편안해서 좋다.
깊은 생각은 있의되 난해 하거나 헷갈리지 않아서 더욱 좋다.

이 가을에 새롭게 알게 된 시인, 우리들의 근화...
늘 건강하고, 앞으로도 더 좋은 시 많이 쓰는 진화하는 시인이 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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