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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피 ㅣ 블랙 캣(Black Cat) 13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전주현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음날 아침에도 비는 내렸다. 케플라비크로 가는 도로에는 커다란 타이어 자국에 물이 고인 곳이 있어 차들이 피해 가고 있었다.
비가 양동이로 퍼붓듯이 쏟아져 에를렌두르는 차창 밖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물보라가 차창을 뒤덮었고,
게다가 남동쪽에서 무지막지하게 불어오는 푹풍이 차창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와이퍼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차 유리의 비를 제거할 수 없기에 에를렌두르는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핸들을 꽉 잡고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앞 차의 브레이크 등만 간신히 쫓아갔다.
그가 아는 바로는 평소 같으면 에바가 한여름의 태양처럼 이렇게 밝게 빛나거나, 목욕을 막 마친 모습을 하고 있다거나,
거피를 끊여 내오면서 항상 아버지를 돌봐온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바는 그를 쳐다보았다.
에를렌두르는 딸이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문구멍 앞으로 오지 않고, 강방 깊숙한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아마도 침대에 누웠거나 벽에 기대앉은 모양이었다.
에를렌두르는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 깊은 곳에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주 차분해져 있었다.
에를렌두르가 문을 두드렸을 때 엘린은 집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차로 돌아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산드게르디까지 계속 더 갈까 망설였다. 차 비로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일기예보라고는 일체 보지 않는 에를렌두르는 도대체
이 마법이 언제쯤에나 풀릴 것인지 궁금했다. 그는 담배연ㄱ를 내뿜으며 이게 노아의 홍수 축소판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죄를 가끔은 씻어줘야 하는 모양이다.
에를렌두르는 굴착기가 30년 묵은 상처를 파헤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버킷이 땅을 파고들 때마다 움찔거렸다.
흙더미가 점점 쌓여갈수록 구덩이는 점점 깊어지면서 그 속의 어둠도 짙어져 갔다. 에를렌두르는 조금 거리를 두고 서서 버킷이 그 상처를 더 깊게, 깊게 파헤치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그 장면이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꿈속에서 이미 다 본 것처럼, 순간적으로 그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마치 꿈속에서 펼쳐지는 일 같았다. 동료들이 거기 둘러서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있고, 지방의회 사람들이 주황색 작업복을 입고 나와 삽에 기대어 서 있고, 목사는 커다란 검정색 코트를 입은 채 서 있었고, 무덤 속으로 쏟아지는 빗물은 굴착기의 버킷안으로 마치 구덩이가 흘리는 피인 양 쏟아져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 사라져 버렸다. 덩그라니 외진 마음 속으로.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본능적으로 문질렀다. 그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는 그런 일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 너는 강한 사람이라 그런 일을 봐도 잘 견텨낼 수 있을 것 같겠지. 그런 일은 너랑은 아무 상관없는 듯 갑옷을 입고 멀리서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고. 하지만 거리를 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철판이나 갑옷도 다 소용없어, 아무도 그렇게 강하지 못해. 죄책감이 악령처럼 따라다니면서 마음속에 톼리를 틀고 들어앉으면 절대 마음 편히 못 살아. 그 구역질나는 일들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때까진. 그런 게 바로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거든. 이번 일도 꼭 그래. 그런 것들이 고삐 풀린 유령처럼 네 속을 휘젓고 다니다가 결국에는 상처만 입히게 될 거야."
그는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 그리고 누구도 워치 않았지만 태어난 아이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연결되어 있는 아이슬란드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죽어간 아이들을 생각했다.
"현미경으로 살펴보는 겁니다. 수집가가 뭔들 안 하겠습니까?" 우표수집가는 발행연도를 봅니다. 책 수집가는 출판연도를 보고, 천문학자들은 온 우주를 눈앞에 보고도 수수께기 간은 부분만 봅니다. 나 역시 끊임없이 내 현미경 헤계만 들여보는 거고."
"소장님은 그 비밀을 모두 갖고 있는 셈이군요. 오랜된 가족의 비밀. 비극과 슬픔, 그리고 죽음 이 모든 것이 컴퓨터에 체계적으로 들어 있는 겁니다. 가족사와 개인사들이. 소장님이나 제 얘기도. 비밀을 모두 가지고 있다가 원할 때마다 꺼내볼수 도 있는 거고요. 한마디로 전 국민을 들여다 보는 유리병 도시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