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권과 2권을 3일에 나누어서 꼼꼼히 읽었다.
리뷰를 쓰기 위해서 다시 한번 읽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그럴 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우선 읽고 난 후의 생각들을 정리해 두고, 다시 읽고 싶을 때까지
완성된 감상문은 미뤄두어야 할 것 같다.
1. 하루끼의 소설은 감각적이다.
하루끼의 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멋진 수트를 입고 와인을 마시면서 재즈를 듣고 있는 거나, 패셔너블한 옷을 입고 멋진 음악을 들으며 에스프레스를 마시고 있는 것과 같은 기분에 빠져든다.
하루끼라는 사람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삶이 소설처럼 감각적일지 아닐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대인의 대부분이 이러한 감각적 경험과 이미지에 노출되어 있고, 멋지고 쿨한 사람이란 이러한 감각적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는 강박관념 속에 놓여 있다. 여기에 일본인 뿐만아니라 우리들도 이러한 감각적 삶에 대한 선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종교와도 같다. 스타벅스를 손에 들고, 페셔너블한 아이템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루끼의 소설을 읽으면 먼저 난 그의 브랜드를 느낀다. '아! 난 하루끼를 읽고 있구나!'는 그 자체로써 소설계의 브랜드이며, 그리고 비록 주인공들은 이런 현대인의 관념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 캐릭터이더라도 하루끼가 묘사하는 스타일과 형식은 감각적으로 읽혀진다. (아마도 하루끼라는 작가는 독자들이 이러한 감각적인 형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거나 작가 스스로 감각적인 형식을 추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감각적인 형식의 글쓰기는 훔치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며 소설 속에서 만들어 낸 세계와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늘 그에게 놀라고 만다. 가끔 그 감각적 형식 때문에 문학적 진정성에 의문이 생길때도 있지만!
2. 하루끼는 엉뚱한 사람이다.
하루끼의 에세이들을 통해서 상상하게 된 하루끼는 매우 유쾌하고 즐거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설과 에세이를 동시에 읽으면서 그는 매우 엉뚱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하루끼 소설을 연구하는 모임이랄지, 그를 사랑하는 애독자모임이랄지,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지만 또 하루끼를 열렬히 사랑했던 필자도 한 달내내 하루끼의 책을 읽으며 그에 대해 상상해 보았지만, 항상 상상하지 못하는 범주에서 늘 독자들을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내는 솜씨를 보고 있자면, 그는 정말 엉뚱한 천재인 것만 같다.
3. 하루끼의 소설은 오마주로 가득하다.
아마도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가 무엇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독자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클래식, 헐리우드 영화, 미국 소설, 재즈, 일본 근대 소설, 역사, 패션, 자동차, 총 등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한다. 또한 이러한 애정어린 소재들은 보다 특별한 의미로 소설에서 중요하게 드러난다. 때로는 이야기 속에 이러한 소재들의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끼워넣어 지기도 하고 이야기의 진행에 중요한 기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오마주의 형태로써 이야기 전체를 기반으로 하기도 하고, 상황을 이끌어 나가기도 하는 등 소재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감각이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야나체크의 음악과 조지오웰의 1984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설 속에서 소재나 배경이상의 존재이다. 때로는 이러한 오마주는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소설을 오감으로 느끼게 하여, 그의 소설을 문화의 보고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오마주는 이야기를 넘어 설 만큼 커서, 문화적 오마주에 의해 증폭되거나 오마주에 대한 이해없이 읽혀질때 이야기가 반토막짜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
(또한 하루끼의 오마주는 그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각적 소재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를 사랑하는 독자는 그를 좋아하기에 재즈를 듣거나, 위대한 유산을 읽고, 그처럼 느끼기를 생각하기를 고대한다. )
4. 하루끼의 소설은 일본적이다.
우리가 욘사마의 성공, 동방신기, 보아의 오리콘 진입에 감격해 하는 사이의 우리의 소설, 만화책, 애니메이션, 그리고 영화와 드라마의 시나리오들까지 일본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마치 리틀 피플의 힘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의 구석 구석까지 긴팔을 늘어뜨리며 소리없이 깊숙히 우리의 문화 속에 자리잡아 가고 있다. 사실 문화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통합해 가는 과정이라지만 일본문화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 문화를 장악해 가고 있다. 이러한 우려는 문화가 다른 문화와의 통합이나 융합을 할 때 발생하는 두려움,이질감이나 반성, 고민이 없이 일본문화가 우리 문화 속에 들어와 있기에 발생한다.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도 돌아보라! 만화책, 애니메이션, 소설, 영화, 일드 등 다양한 문화 속에서 얼마나 쉽게 일본을 느낄 수 있는지)
적어도 무엇이 다르고 이질적이고 일본적인지 이해하지 못한 체 문화가 통합되어 버린다는 것이 어찌 두렵지 않은가? 이를 통해서 우리가 누리는 문화의 현실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지, 연예인들의 일본 진출을 통해 우리의 한류만을 추켜세우는 것도, 일본 문화의 저력과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 것을 지키자는 것도 아니다.
하루끼의 소설을 읽고 일본적이라고 논하는 것은 참 바보같은 짓이다. 왜냐하면 하루끼는 일본인이니, 그의 소설은 당연히 일본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못했다. 하루끼라는 브랜드가 그를 더 특별하게 해서 그런 걸까?(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더 많은 일본 문화를 접하면서, 그의 소설이 일본을 담고 있다는 것, 우리와 다르기에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미국 문학에 대한 애정은 일본인들의 특별한 미일감정에서, 그의 주인공들의 근면성은 일본민족의 특별한 장인정신에서, 환상적인 이야기들와 수수께끼들은 일본문학의 장르소설들에서, 일본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갈 때 그의 소설이 좀 더 분명하게 보였고, 이는 일본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볼 때도 그랬다. 이제는 더 가까이 다가온 일본 문화을 알기 위해서 그들을 공부하고 이해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문화는 통합이 아니라 예속되어가고 말것만 같다.
5. 하루끼의 페르소나들은 그를 닮았다.
나만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떠한 외모와 성품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의 주인공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며, 이는 어떠한 자기계발서보다도 더 큰 모멘트로 작용한다. 언제나 하루끼의 소설을 읽으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어쩌면 주인공들이 그를 닮았기에, 꼭 형제나 자매처럼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육체에 민감하거나 육체를 단련하는 데 성실하며, 감수성이 예민하며 매우 감각적으로 생각하고 대화한다. 또한 그들의 삶이나 생활은 패션처럼 쿨하고 대범하다. 또한 그들의 향수와 수수께끼들은 그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며 우리를 끌어들인다.
수수께끼같은 이야기들, 환상적인 배경들, 닮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주인공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루끼의 멋들어진 이야기 솜씨가 그의 소설을 푹 빠져들게 만든다. 이에 나는 그를 가진 일본문학계를 질투하고,(사실 하루끼 뿐이랴! 일본문학의 매력적인 작가들은 넘쳐나고, 그들의 책들을 끊임없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인쇄되고 있으니 어찌 질투나지 않으리!) 하루끼라는 브랜드를 경외하는 만큼 두려워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작가들의 책들도 더 많이 읽어서 우리만의 하루끼를 발굴해 주리라 상상해본다. 아니면 하루끼로 공기번데기를 만들어 우리나라에도 다른 하루끼를 만들어 내는 상상이라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