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 Ret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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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상쾌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그저 강렬하게 계속 불어오는 바람은 여성들을 흔들고 헝클어지게 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공동묘지에서 묘비를 닦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모습, 그리고 그녀들 속에 라이문다가 있다. 그녀의 온몸을 훑으며 지나가는 바람 앞에, 부모님 묘비 위 꽃다발은 쓰러지고, 정성스레 묘비를 닦아보지만, 오히려 안쓰러울 정도로 다시 먼지는 계속 쌓일 뿐이다. 이처럼 라이문다의 고향은 그 자체가 바람이다. 마치 소설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의 고장 명물이 안개였던 것처럼. 그 바람은 끊임없이 그녀를 흔들고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간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최근 국내 개봉작 <귀향>은 여성들의 삶 속에서 계속 되는 바람의 흔들림과 그로 인한 상처가 소통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처의 실체, 봉합하기 
 

그녀를 만들어 온 것은, 그녀 자체보다는 주변을 통한 흔들림에서 비롯된다. 고단한 삶 속, 불쑥 벌어지는 남편 파코의 죽음과 이후, 다시 들려오는 이모의 죽음 소식, 절친한 고향친구 아우구스티나의 암 선고 소식 등은 그녀의 삶 속 그칠 줄 모르는 바람이고, 상처가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겪는 삶의 바람들을 모두 덮어두고 은폐시키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감독은 라이문다가 휴지통에 맥주캔을 버리고, 파코의 피 묻은 휴지뭉치를 버리고, 설거지를 하고 칼을 씻는 장면들을 강조한다. 이는 관객들이 그녀의 과거 사연을 알 수는 없지만,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이를 혼자서 묻어두려 하는 존재임을 느끼게 한다. 또한 딸인 파울라가 아버지의 강간을 위협하다 살인을 저지르자, 냉장고 속에 아무도 모르게 담아두는 행위, 이후 다시 강가의 땅 속에 묻어버리는 행동 등은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삶의 상처들을 혼자 묻어둠으로써 봉합하려는 안간힘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봉합은 상처 자체를 아물게 하지 못 하고, 순간마다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녀 곁에 남아 있다. 파울라 이모는 그녀의 과거 트라우마의 실체이다. 과거 아버지의 강간으로 딸까지 가지게 되는 비극 속에서, 그녀는 고향을 떠나고 마드리드에서 파코와 가족을 이루고 살아간다. 하지만, 가장 먼저 조카의 상처를 알게 되고, 이후 화재의 충격까지 떠 안은 그녀의 이모는 그 충격으로 급속히 쇠약해진다. 아버지로부터 당한 과거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이모는 그 자체로 라이문다에게는 지우지 못한 과거 상처의 실체인 것이다. 반면, 남편 파코는 그녀의 현재 트라우마의 실체이다. 파코 역시, 이모가 돌아가시는 날, 딸 파울라에 의해 죽게 되고, 과거 자신의 트라우마는 그대로 딸에 의해 재현된다.

 이처럼 상처가 그녀 곁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그 실체를 부정하려 하고, 혼자서 감당하려고 한다. 그녀는 이모의 장례식에 가지 않음으로서, 과거 자기 상처의 실체를 덮어 두려 하고, 남편의 시신을 딸과 동생 몰래 묻음으로서 현실 속에 다시 꺼내져 뒤엉키게 되는 삶의 순간을 지연시키려 한다. 
 

상처의 흔적, 바라보기

하지만 그녀의 과거와 현재가 이미 일어난 사실이듯이, 그녀의 상처 역시 환영이 아닌 실체였음을 그녀는 이제 마주하게 된다. 그녀에게 상처의 흔적을 다시 바라보게끔 이끄는 것은 그녀 곁에 있는 여성들-파울라, 쏠레, 아우구스티나-이다.

라이문다는 매사에 싸움닭 같고, 억척스런 여성이지만, 딸 앞에서는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을 차마 외면하지 못 한다. (이는 과거의 상처를 감싸준 존재가 이모였다면, 현실에서는 남편과 이모의 빈 자리를 채워주는 존재가 딸로서, 라이문다가 딸의 이름을 이모의 이름과 같은 것-파울라-으로 지었다는 데서도 이해할 수 있다.) 평소 노래를 잊고 살아온 라이문다가 노래를 하게 되는 것도 딸이 있기 때문이고, 이는 그녀의 마음 속에 눌려 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이다. 이후, 용서를 구하러 왔다는 어머니를 마주하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집을 빠져 나오는 그녀에게 지금 당장 가서 얘기하라고 말을 건네는 것도 그녀의 딸, 파울라다. 또한 쏠레는 어머니가 다시 나타난 사실을 라이문다에게 알림으로써, 언니가 현실에서 어머니를 수용할 수 있도록 이끈다. (쏠레와 함께 있던 부엌에서 라이문다가 접시 위에 힘겹게 음식을 꺼내 담는 모습은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임을 암시한다) 친구인 아우구스티나 역시, 죽음을 앞두고 라이문다에게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생사여부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면서, 결국 그녀의 과거 상처의 흔적을 다시 꺼내보도록 말을 건넨다. 결국, 그녀는 마법처럼 찾아 온 어머니를 마주하게 된다.

상처의 치유, 소통을 통한 동일시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이모와 남편 파코의 죽음,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 라이문다의 곁에는 어머니가 찾아온다. 어머니는 과거 딸과 남편 사이 있었던 비극을 알고서 느꼈던 감정과 이후 벌어진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이제 딸은 오랜 세월동안 담아두었던 깊은 상처가 결국은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시간이 멈춘 듯, 두 모녀만이 머무는 벤치에서의 소통을 통해 서로가 지니고 있었던 상처들은 치유된다.

결국 이 소통의 과정에서, 남편으로부터 버림 받고 오랜 세월 혼자 유령처럼 지내온 가여운 어머니의 모습은 오랜 세월 객지에서 가난하게 생활하고, 남편까지 잃은 라이문다와 동일시된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 딸이 겪은 비극을 알고 나서, 그 분노를 삼켜야 했던 어머니의 사연은 딸이자 동생인 파울라의 상처를 껴안아야 했던 라이문다와 다시 한 번 동일시된다. 나아가 앞서 지적했듯, 과거 라이문다의 비극을 경험하게 되는 딸 파울라는 라이문다와 동일시된다. 친구인 아우구스티나 역시 어머니를 잃고, 혼자 죽음을 맞이 하면서 보살핌이 절실한 존재로 변해 가고, 이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한 이모 파울라의 모습과 동일시 된다.

 진실된 소통을 통해 피어나는 꽃

영화에서 감독은 극적인 사건들을 장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파코가 파울라를 강간하려다 죽게 되는 순간, 혹은 라이문다가 겪어야 했던 충격적 사건의 순간들을 직접적인 장면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건들이 상처로 여성들에게 남겨진 이후, 그녀들은 어떻게 현실을 마주하고 치유하는가’이다. 이는 감독의 전작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나 <그녀에게>서도 마찬가지의 화두였다. 감독은 자극적이고 극적일 수 있는 사건들은 오히려 생략하고 남은 사람들의 소통을 통해 그 진실이 어떻게 공감으로 이어지고 치유되는지를 좇는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 역시, 그 사건들을 관음증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눈빛과 대사를 통해 전해 들음으로서,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기회와 인물들의 감정을 함께 공유하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감독이 가진 힘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바람이 분다.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껴안은 소통의 순간 이후에도 바람은 다시 그녀들을 거칠게 흔든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녀들은 모든 것이 ‘저 망할 놈의 바람’ 때문이라며 부정하지 않는다. 이제 라이문다는 그런 흔들림이 그녀 자신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안다. 그 바람은 그녀들 너머에서 시작되어 그녀들을 헝클어지게 하는 운명이지만, 이미 많은 상처를 감당하고 나누게 된 그녀들에게 바람은 더 큰 단단함으로 그녀들을 묶이게 한다. 이제 라이문다는  거칠게 불어 오는 바람을 뚫고 아우구스티나를 보살피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 간다. 그리고 손바닥을 두드리며 슬픔 맺힌 노래를 부를 때의 순간처럼 그녀는 어머니를 향해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얘기한다. 아직도 어머니에게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고. 라이문다는 이제 남을 통해서가 아닌 스스로 자신의 아픔을 꺼내 보이는 용기와 어머니에 대한 믿음을 보여 준다. 이제 바람 속 그녀의 흔들림은 꽃처럼 피어나고, 이는 그녀들 사이에서 지워질 수 없는 향기이자 생명으로 다시 고향에 뿌리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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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가시 2009-03-0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나니 왠지 춘희가 생각이 나는 군요..흠..왜일까..
 
메종 드 히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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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길을 가다

무심코, <내 어머니의 모든 것> OST 앨범을 발견.

주저없이 손 안에 넣고,

얼마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종일 시달리던 하루의 에너지를 다독이고 싶었다.

얼마 후 나의 선택은 구입해 둔 채 몇달 동안 꽂아두기만 해 온 <메종 드 히미코> 만나기.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아버지가 게이라는 사실이 숨겨진 채 마지막에

그의 모습이 나타나고, 마음을 터지게 하는 영화였다.

 

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영화는

이미 아버지가 게이의 삶을 택하고, 자신과 어머니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 초반, 아버지의 남자 친구가 딸을 찾아오면서,

딸과 아버지 히미코의 해후는 시작된다.

 

덧붙여, 이 영화는 <브로크백 마운틴>이 마음에 품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랑에 대한 얘기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게이'라는 다소 자극적으로 흐를 수 있는 소재도

일상의 눈으로 따라가고 있음은 이 영화의 매력이라 하겠다.

감독의 전작 <조제~>처럼.....

 
억지스럽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게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비정상의 타자로 여기거나

그 반대로 매력적이고 젊은 존재들이라고 또 은연중에 신비롭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게이 역시, 아프고, 늙고, 다른 사람들처럼 모든 게 보통이라는 걸

느끼게 해 준다는 건 이 영화가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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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가시 2009-03-09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조제보다 더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마지막 담벼락 글씨를 누가 썻는지가 정말 궁금해요.^^

seepurple 2009-03-09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저는 <조제>가 더 먼저 떠올라요. 특히 조제는 결말부분에서 환상적으로 그리지 않고, 남자 주인공의 내면갈등도 잘 베어나고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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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평생을 거의 집 안에서 지내면서

 인간과 신에 대한 심연까지 치열하게 파고 들었다.

 여고시절,  


내가 폭 빠져 바라보곤 했던 국사 선생님께서는

칸트의 이야기를 하시며,

집 앞 마당에서도 우주를 호흡할 수 있는 눈이 있음을 알려 주셨다.

이 영화가 말하는 것 맥락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숫자 속에, 우리의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깃들여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 인생의 경이이고, 행복이라는 것.

무엇보다, 영화는 모든 간격을 넘어,

우리는 나눌 수 있고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걸 억지스럽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따뜻함을 나눌 수 있고,

거기에서 우리의 진실은 계속될 것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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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 The H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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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괴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러워.

 
매력적?인 괴물이 탄생했다.

2년여에 걸친 작업 속,

날렵한 몸놀림과, 물과 뭍을 넘나들며 사람들의 일상 속에 공포로 나타난다.

티라노사우르스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어딘가에 껴맞출만큼 실존하지도 않는,

새롭게 창조된,

그래서 더 한국을 배경으로 했을때 현실감있는 괴물이다.

 

하지만, 괴물의 실체는 우리 내부의 괴물을 형상화한 것에 불과하다.

 

둘. 가족, 그 코 끝 찡해지는

 
배우들 모두, 정말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길가다가 어디선가 만난 기억이 있는 우리 아버지들, 삼촌, 여동생의 모습 그대로다.

실제, 촬영시에는 괴물은 배우들 머리 속에만 존재했을 터.

그래도, 배우들은 괴물을 실제보다 더 느끼고 있고 열연한다.

('한국'과 '가족'에 대한 얘기는 좀 더 성의있게 다루도록 하자)

 
셋. 최고의 장면 둘

 
1) 영화 시작하고, 바로, 스크린에 등장,

무차별로 사람들을 공격하는 괴물의 모습은 이 영화, 최고의 장면.

 
2) 교각 아래, 유연하게 360도 회전하던 괴물의 모습은

날렵, 생생함 자체다. 

헐리웃에 에이리언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돌연변이로 한강에서 생기고 자란, 이 괴물이

당분간 한국판 괴물의 대명사로 기억되지 않을까.

 
사족) 개인적으로는 몇달전부터 기다렸던 영화였고,-주변에서는 호들갑떤다고 할 정도- 엔딩크래딧이 올라갈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잘만든 블록버스터를 본 느낌. (그만큼 한구석에서는 아쉬움이 남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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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가시 2009-03-09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g만 좀더 완벽했다면 정말 최고의 영화였을텐데.ㅠ.ㅠ 너무 아쉬웠어요.ㅠ.ㅠ
 
모래와 안개의 집 - House of Sand and F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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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살아있는 자들의 상처, 그 비밀들

   딸의 화려한 결혼식장에서 베라니 대령(벤킹슬리)은 여유로운 중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그는 낮에는 막노동을,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며, 가족들 모르게, 고국 이란에서 보장받았던 윤택한 삶을 지켜나가려고 애쓰는 인물이다. 군인으로서 명령을 내리기만 했던 그에게, 미국에서의 삶은 힘든 노동을 감수하면서, 살아갈 것을 명령한다. 즉, 그는 고국에서 비밀경찰로 일하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추방 당한 상처와 미국에서 비참한 노동을 하며 가족들을 보살펴야 하는 비밀을 간직한 인물이다. 반면 그의 부인 나디(소레아그다시루)는 과거 추방당할 때의 충격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인물로,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집에만 머물며 남편의 일방적 보호 속 자신의 병을 견뎌내야 하는 비밀을 갖고 있다. 다음으로, 해변집의 원래 소유주인 캐시(제니퍼 코넬리) 역시 힘들게 가정부 일을 하며 생활하고, 수년간 알콜 중독과 이혼의 상처를 비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우연처럼 나타난 보안관 레스터(론 엘다드)는 오래된 결혼생활에서도 외로움을 품고 매일을 살아가는 비밀을 안고 있다. 

 2. 상처는 어디에서 생겼나 
 

 캐시의 상처는 계약금의 4배를 요구하며 집을 내놓기를 거부하는 베라니 때문인가. 반대로 베라니의 상처는 온전하게 집을 산 그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래의 자기 집을 내놓으라는 캐시의 막무가내 때문인가.

  작품에서 인물들의 상처는 근본적으로 상대방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캐시와 베라니는 모두 나름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 내러티브에서처럼 어느 한 명이 선인(善人,주동인물)이고, 다른 한 명이 악인(惡人, 반동인물)으로 설정되어 있지도 않고, 그들 사이에 근원적 적대감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영화 <주먹이 운다>의 주인공들처럼 각자의 사연들을 지니고 있고, 서로의 소박한 꿈을 위해 링 위에서 대면하는 존재들일 뿐이다.

  결국, 이들의 상처, 즉 갈등의 원인은 그들 삶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는 관심도 없는 세무서 당국의 실수로 비롯된 것이다. 처음, 집으로 계속 찾아오는 캐시에게 베라니는 그녀를 강하게 내쫓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였다. 하지만, 갈등의 골이 이미 깊어진 후, 그녀가 차 안에서 자살기도 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상처 받은 새’로 여기면서 보호한다. 또한 그녀 역시, 뒤늦게 베라니를 발견하고는 그를 살리기 위해 진심으로 애를 쓴다. 또한 이 외에도, 발을 다친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감싸는 그의 부인 나디의 모습이나 아들의 죽음으로 고통을 느끼는 베라니를 보며, 충격과 자책에 휩싸이는 레스터의 모습은, 그들 모두가 서로에의 상처의 원인도 아니고,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고된 일상으로, 가족들의 삶을 지켜 나가는 베라니의 모습은, 30년 동안 고되게 살다가 집 하나를 남기고 돌아가신 캐시의 아버지에 다름 아니며, 캐시는 감싸주고 보호해줘야 할 연약한 그의 또 다른 딸이다.

 
  3. 살아간다는 건, 그 답을 대하는 불편함

 우리에게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소설가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에서 얘기한다. 어렸을 적,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소풍날이 아니라, 소풍 전날의 설레임이였음을……. 실제 소풍을 가던 날은 별 다를 게 없는 일상에 불과했음을…….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는 그 안을 그대로 들여다보면 볼수록,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상처 투성이이고, 모욕과 고된 일상을 참아내야 하는 날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객들은 인물들의 상처 안은 삶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고 마주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그들은 매순간 살아 있었다. 쇠락해진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가족, 지금이 아닌 미래에 대한 꿈이 그들에게는 살아감의 이유였다. 베라니는 힘든 현실에서도 그들 가족이 신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믿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고, 캐시는 한순간에 집을 잃지만, 갖은 모욕에도 자기 집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고, 또다른 사랑의 감정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처럼 그들 역시, 그들의 믿음이 그들 삶의 현실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우린 다시 한 번, 인물들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삶의 구조적 모순과 아픔을 직면하게 된다. 그들이 꿈꾸던 소박한 꿈은 결국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다. 베라니는 자신의 분신이였던 아들의 죽음으로, 아내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 레스텔은 수감되며, 캐시는 어떻게든 되찾으려 했던 그녀의 집을 결국,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과 마주하고 있는 인간 삶의 이야기로,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이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더욱 아프고 예민하게 다가오는 우리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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